뷔슙 좀비물 TXT & 방탄 슈가 대취타 믹스테잎 2차 창작물 모음Culture/MusicNowhere Cafe2023-02-1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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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국] 노리플라이 (No Reply)
*월간뷔국 11월 호 글입니다.
희망 하나 없는 삶일지라도 살아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오늘도 나는 살아있기에, 그리고 당신 역시 살아있기에.
오늘도 살아남은 우리를, 내일도 지키기 위해.
901은, 그 단 하나의 이유를 곱씹으며 방아쇠를 다시금 움켜쥐었다.
901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앞을 단단히 가로막은 철문과, 이어지는 침묵이었다. 조심히 내딛는 발자국 소리가 심장소리마냥 세차게 요동쳤다. 901이 숨을 죽일수록, 모니터를 통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태형도 함께 숨을 죽였다. 고요를 가르고 철문이 열렸다. 901이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또 다른, 새로운 길이었다. 무거운 문을 밀어 닫는 소리와 함께 그제야 태형이 참았던 숨을 대신하여 뱉었다.
“본진 벙커 진입 성공. 후발대 상황 보고 바람.”
“입구 봉쇄로 추정. 후방에서 적진이 붙을 것 같습니다.”
“엄호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중위님.”
901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심해, 901. 선발대 인원이 너무 흩어져있다.”
“알겠습니다.”
901이 쓰고 있는 고글을 통해 교신을 받는 태형은 단 한 번도 정국의 표정을 보지 못 했다.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정국이 눈에 담고 있는 풍경, 그 뿐. 태형은 정국의 시선으로, 숨소리로, 그리고 목소리로 정국을 읽는 데에 어느새 익숙해졌다. 오늘도 901의 시선엔 좁고 외로운, 낯선 길 뿐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푸른 잎사귀를 보지 못한, 너는 죽어가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어린 아이였다.
“...알지? 이번이 마지막이야.”
“…….”
“꼭 돌아와서 받아라. 내가 주는 이름.”
“...알겠습니다.”
아직 이름 석 자도 받지 못 한 채로 살아가는 가여운 아이. 이번이 901의 꼭 백 번째 투입이었고, 이번 역시 살아남으면 너는 진정으로 이곳의 사람이 된다. 총기와 아무렇게나 뒤섞인 무기번호에 불과한 일련번호를 떼고서는 번듯한 이름과 함께 이곳의 일원으로, 진짜 이 세계의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겠지. 몇 번이고 벌레의 것과 같던 목숨을 움켜쥐고서 살아 돌아온 너에게, 태형은 꼭 자신이 지은 이름을 주고 싶었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로, 너를 직접 손잡아 이끌고 싶었으니까.
* * *
몇 번의 교전이 있었다. 교전이 끝날 때마다 다른 선발대를 확인하는 본부지휘관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이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간간히 후발대장의 목소리만이 901의 생사를 물었다. 선발대장 901. 살아 있습니까.
901은 늘 생사의 대답을 아꼈다. 대신 태형이 직접 개조해 준 CZ Bren의 탄창을 가는 소리가 901의 거친 숨소리와 뒤엉켜 모니터를, 무전을 울리는 것으로 901이 살아있음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자욱하던 탄연이 차츰 거둬지고 901은 그 아래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밟아나갔다. 긴장 때문인지 상처 때문인지 불규칙한 호흡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다친 곳은 없어? 라는 물음에는 단 한 번도 대답해 준 적이 없기에. 그것은 작전에 있어 불필요한 사항임을 901은 알았다. 임무를 완수한다. 명령의 제 1항이었다.
여러 번의 문을 열어젖혔다. 탄환이 얼마 남지 않은 돌격소총을 등에 짊어 맨 901이 허리춤에 걸어두었던 기관단총을 양 손으로 쥐어들었다. 점점 더 단단해지는 철문의 두께를 가늠해보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침묵이 짙어지고,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춰 숨을 몰아쉬는 901의 심장박동을 따라 태형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입에 물린 얇게 말은 담배가 벌써 몇 대 째였다.
“901.”
“좌표를 봐서는 목표지점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901은 궁금하지도 않아? 네가 받게 될 이름.”
태형의 물음에 901이 슬며시 웃었다. 쳐내듯 짧은 웃음소리가 모니터에도 흔들리는 먼지처럼 울렸다. 아마, 태형이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겠지. 쓸데없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늘 침묵으로 돌려보내던 황망한 질문에 901이 입을 열었다.
“중위님 센스로 봐서는 복돌이나 그런 이름 아닐까 싶은데요.”
“내 센스를 너무 폄하한다, 너.”
답지 않게 가벼운 농담으로 말을 받아치는 901의 목소리에 그제야 태형도 따라 웃었다. 늘 굳은 표정에 정제된 대답만을 내놓던 901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너는 지금 어떠한 표정을 하고 있을까. 늘 인형처럼 같은 모습이던 901의 얼굴이 태형의 눈앞에 잔상처럼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 봐, 901. 너 지금 나 비웃었지.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늘 그렇듯이. 무척이나 너답게.
죽은 자처럼 걷는 발걸음이 스산했다. 901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행동해선 안 됐으니까. 그의 삶이 그러했다. 숨 하나조차 편히 쉬어서는 안 되는, 901은 모두에게 저당 잡힌 목숨이었다. 또 하나의 두꺼운 철문을 눈앞에 두고 후발대의 교신이 이어졌다. 선발대 전원 사망 확인. 앞으로 세 차례의 추가 교전 예상. 버텨달라는 말이었다. 901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런데 말이야 901.”
침묵을 가르는 마른 태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901은 주머니에서 보안을 거칠 지문을 꺼내는 중이었다. 스러진 시체를 뒤적여 완장을 단 이의 손가락을 잘랐다. 이 사람의 지문이라면, 분명 마지막까지 통과할 수 있겠지. 가슴팍에 달린 포켓을 함부로 뒤적여 피 젖은 손가락을 들었다. 귓속에서 여럿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울렸다. 그 사이를 파고드는 단 하나의 또렷한 목소리. 정확히 저를 지칭하는, 늘 나만을 부르는.
“중위님, 말 좀 시키지 마십시오. 교신 겹칩니다.”
“알았어. 합죽이다, 합.”
그것을 901이 모를 리 없었다. 맨발을 한 채로 폐허에 웅크려 살던 어린 아이가 901이란 일련번호를 받던 그 날부터 줄곧 태형의 시선 끝엔 그 아이가 걸려 있었으니까. 무산소 호흡기를 끼고 내달리던 실험실에서도, 숱한 총성을 피해 몸을 웅크려 숨기던 공터에서도 태형은 언제나 피맺힌 입술을 악 문 901을 지켜보았다. 눈 발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아이를 대신 하여 모든 기도를 짊어진 채로. 스치듯 마주하던 그 시선을 901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코 저를 홀로 버려두지 않는, 당신의 끈질긴 기도. 유일하게 나를 가엾은 생명으로 마주하여 주는 당신의, 당신을.
“무기번호 901. 목표는 Simple K 사살 및 4월 대집행 보안 문서 입수.”
“…….”
“그럼 입장합니다.”
나는 그를 위해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 사실 하나가, 나를 아흔 아홉의 작전에서 살아남게 하였다.
* * *
총성이 자욱했다. 탄연으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와, 구역감을 일으킬 정도로 어지러운 소음들에 태형의 심장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날선 비명이 귓가를 찢어놓는 듯 불쾌했다. 어느새 낭자하던 총성들도 잦아 들고, 서로의 몸을 부딪치는 타격소리들만이 가득했다. 그 속에서도 기어이 901은 살아 있었다. 여전히 모니터는 태형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결국 마지막에 남은 것은 또 다시 901의 숨소리 하나였다. 901이 비춰주는 문서 위로 자꾸만 붉은 피가 피어올랐다. 급하게 피를 문질러내는 손길이 고통으로 떨리고 있었다. 글자 하나라도 상할까 황급한 손짓이었다. 본부에서는 빠르게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문서를 스캔했다.
“다 보셨습니까? 그럼 이 문서는 소각하겠습니다.”
단어 사이마다 가쁜 숨이 뒤섞였다. 홀로 남은 이의 해방의 숨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숨길 필요 없는 자유로운 숨결. 그 숨결에서 네 고통과 고독이 전해졌다. 내 마음 한 켠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901은 백 번째 임무를 완수하였다. 남은 것은, 복귀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야 했다. 건네주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아 태형은 그간 쌓아온 시간만큼이나 벅차올랐다.
건네야 하는데. 건넸어야 하는데.
“일단 복귀가 우선이다. 소각은 나중…….”
오롯한 숨소리로 가득하던 모니터로 순식간에 난사되는 총성이 그 틈을 비집었다. 울리는 비명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스러져 내리는 시선,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901의 숨소리. 그것이 전부였다. 모니터는 순식간에 부옇게 흐려졌다가 이내 어둠으로 물들었다. 더는 별이 보이지 않는 까만 밤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태형은 여전히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901.. 901!”
그 순간, 썩어가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 익숙한 네가 떠올랐다. 숱한 훈련 속에서 네 말간 얼굴은 늘 죽은 공기에 휩싸여 너의 생명을 토해내게 만들었지. 죽음을 코앞에 둔 우리의 절망을, 기어이 너는 딛고 올라섰다. 우리는 매일을 절망하고,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너는 왜 그렇게 악착같은지. 던진 물음에 처음으로 901이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내보이는 901의 진짜 모습.
ㅡ살고 싶습니다.
ㅡ
ㅡ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ㅡ
ㅡ저도 중위님처럼,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나 살아 있을 수 없는 901의 꿈이라는 것을 태형은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901의 꿈이 태형의 이유가 되었다. 절망으로만 빼곡한 세상에서 태형에게도 다시 꿈이라는 것들이 가지처럼 파생되었다. 꼭 이루어주고 싶었어. 부디 나처럼 살게 해 주고, 내가 언젠가 그리워하던 꽃나무를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지금까진 차마 소망하지도 못 했던 꿈 하나, 둘을. 그래서 피 흘리며 꾸역꾸역 살아내는 너의 아흔 아홉의 목숨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함께 했지. 함께 기도 하고, 함께 안도 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너는, 우리는 기필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너의 삶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너의 죽음을.
처음으로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정국아…….”
너는 결코 몰랐을 너의 이름을 불러본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주고 싶었던 너의 삶이었다.
“…….”
낯선 이름 속에서 901이 평안으로 잦아들었다. 늘 같은 곳을 바라보아야 했기에 끝내 너를 마주할 수 없는 태형은, 네가 지금 어떠한 표정으로 홀로 남아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항상 지켜봐 주었는데. 왜 정작 이 순간에 나는 너를 지킬 수 없는지.
“정국아... 전정국…….”
지금쯤 너는, 끝내 하지 못 했던 나의 말이 궁금하지 않을까. 앞으로 내가 준 이름 석 자로 불릴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나와 함께 하고 싶은 것을. 이름 한 번 다정히 불러주지 못한 나에게, 네가 많은 것을 원하길 바랐으니까. 너의 이름을 무수히 많이 불러달라고, 너는 보지 못 했던 하얀 들꽃이, 푸른 하늘이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네 시선에 담긴 수많은 고독을 보여줬던 것처럼, 내 시선에 담겼던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저에게도 보여 달라고. 처음 만났던 그 날의 어린 눈으로 가득 이야기 해 주길 바랐는데.
너는 여전히 생사의 대답을 아꼈다. 생의 것인지, 죽음의 것인지 모호한 바스락거림만이 너를 겨우 짐작케 했다. 나를 부르는 것만 같던 미약한 숨소리가 어느새 촛불처럼 꺼져 있었다. 내 귓가에는 환청처럼 네 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 나는 몇 번이고 너를 다시 불렀다. 정국아, 정국아.
아마 너는 영원히 답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여전히 너는 침묵으로 내게 답할 것이다.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이번에도 반드시 살아 돌아올 테니까.
그렇게라도 믿지 않으면, 아마도 나는 너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까.
* * *
황무지에 버려진 우리라도 좋았다.내 어릴 적 보았던 푸른 풀 한 포기를 보여줄 수는 없을지 몰라도,나는 너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어. 나는 너와 함께 살고 싶었어. 정국아.
-뷔국전력
마주한 시선의 흔극은 저민 칼날처럼 간소롬하다. 단정하게 무릎을 꿇은 그 위로부터 동백같은 옷자락이 물길처럼 흘러 바닥에 반듯하게 닿아있었다. 동백의 옷자락부터 훑어 올라간 눈길이 마주한 시선과 단단히 맞닿자 종이를 접듯 그렇게 엉글거린다. 웃음 너머에서 희미한 호롱불이 시선의 끝에서 무희처럼 춤을 춘다.
한참을 앙글대던 그 웃음이 무거운 먼지처럼 한참의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가라앉고, 그 시간의 간격에서 동백의 옷을 입은 남자는, 김태형은, 푸석하게 마른 손을 말아 쥐었다. 벙어리처럼 다물려 있던 마주한 남자의 입술이 꽃을 피우듯 그렇게 열렸다.
"그대는 내가 지켜드릴 것입니다."
그리 이야기하는 남자는 다시 봄바람이 내려앉듯 웃었다. 아직 소년의 태를 벗지 못한 앳된 웃음은 고봉밥처럼 소복이 담긴 한 겨울의 눈꽃마냥 그렇게 순하고 맑았다. 그 옛날 형님ㅡ 형님ㅡ 하고 태형을 부르던 붉은 입술은 홍매화처럼 붉다. 잠시 과거로부터의 시간을 회상하던 풍경이 눈꽃을 적시는 그 눈물에 사르르 녹아 흐른다. 손등을 다 덮은 옷자락으로 눈 끝을 찍어 누르지만 쉬이 눈물이 멈추지 않는 듯 하였다. 홍매화처럼 붉은 입술이 다시 벌어지며 그 입술 새로 건건한 눈물이 타고 흐른다.
"내 서자로 태어난 까닭으로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그 어느 것 하나 없지만."
눈물을 한움큼 집어 마신다. 대신 눈물 아래로 묻어 두듯 삼키던 밭은 숨이 아침 햇살을 받은 견우화처럼 그리 터져 열린다. 소년은 남은 눈물을 마치 상흔을 남기듯 단단한 손길로 찍어 눌렀고, 태형은 어느 것 하나 건넬 수 있는 말이 없기에 그저 입술을 쇠문처럼 걸어 잠근다.
"그래도 그대 하나만큼은 내가 지켜드릴 것입니다."
마른 몸집을 하고 눈물마냥 저의 입술을 찍어 누르던 그 날의 소년은 이미 10년도 더 된 기억이었다. 나는 형님이 좋습니다. 접아처럼 나풀대는 웃음은 이제 감히 회상될 수도 없었다. 방불한 지난날의 아기씨는 이제 열여덟의 소년이 되어 찌꺼기처럼 남은 지난 기억을 눈물로 쏟아낸다. 그 눈물에 눈이 녹아내리듯 가슴 한 켠에 구멍이 생기며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누님을 부탁드립니다."
ㅡ형님도 제가 좋으십니까.
ㅡ예, 저도 아기씨가 좋습니다.
마주하던 웃음이 있었다.
ㅡ그럼 형님은 저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ㅡ형님만은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쓸쓸히 웃으며 안겨오던, 작은 짐승 같던 그 모습을 차마 뿌리지지 못하던 태형이 있었다. 종내 이러한 끝은 맛 보아야만 할 것을 알았음에도, 결국 소년의 눈물을 보고서야 이 감정의 매듭을 지을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태형은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정국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그렇게 눌러 담은 세월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 세월이 벌써 강산을 한 일 번 변하게 하여 자연을 그 때보다 크고 푸르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의 시간에서 이렇게 훌쩍 자란 소년이 이제 마지막으로 저의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남은 눈물을 모두 받아 낸, 젖어 무거운 천 자락의 무게 만큼이나 남은 간격의 침묵이 무거웁다. 태형은 낯을 잿빛으로 물들였고, 소년은 그 옛날의 소아처럼 웃었다. 첫 눈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흙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사라지는 가을 끝자락의 그 눈송이처럼.
"이제 제 걱정일랑 내려 놓으시고, 공주마마와 조정의 안녕을 부탁드립니다."
ㅡ설영군(雪榮君)...
태형은 말끝을 안개자락처럼 흩날리며 남은 말을 시간이 흐르는 침묵 안으로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마치 이별을 고하듯 정국에게 읍을 올린다. 한참을 엎드린 그 어둠에서 차마 눈꽃을 녹일 수 없는 눈물을 삼키고, 그 덕에 붉어진 눈가를 겨우내 가라앉히며 상기된 얼굴을 들어올렸다.
태형의 앞에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 저와 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어 앉은 소년이 말갛게 웃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은 그 어떤 말도 건넬 수 없기에, 태형은 하는 수 없이 아직은 저보다 작고 마른 그 등을 끌어안았다. 이 품을 놓으면, 이제는 진정으로 소년에게서 제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서걱이는 눈 속에서 동백이 수수히 피어올랐다. 이렇게 겨울이 지나, 곧 봄이 오려 하고 있었다. 눈은 녹아내리고, 동백꽃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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