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가을에 읽기 좋은 따스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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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남는가
정치가에게 권력을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부자들에게 돈을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성직자에게 직위를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지식인에게 명성을 빼 보라
무엇이 남는가
빼 버리고 남은 그것이 바로 그다
그리하여 다시
나에게 영혼을 빼 보라
나에게 사랑을 빼 보라
나에게 정의를 빼 보라
그래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면
그래도 태연히 내가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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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
물건을 살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 것 단단한 것 단아한 것
일을 할 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단단하게 단아하게
사람을 볼때면
3단을 생각한다
단순한가 단단한가 단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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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집 없이 추운 이여
그 사람도 집이 없었습니다
노동에 지친이여
그 사람도 괴로운 노동자였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는 이여
그 사람도 자기 땅에서 배척당했습니다
배신에 떠는 이여
그 사람도 마지막 날 친구 하나 없었습니다
쓰러져 우는 이여
그 사람도 영원한 현실 패배자였습니다
그 사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희망이 있었습니다
피투성이로 품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패배와 죽음까지를 끌어안고
마침내 무력한 사랑으로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 사람도 그러했둣이
당신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지상의 작고 힘없는 사람 중의 하나인
당신 속에 그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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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혼자 떠나라
이행을 떠난 땐 혼자 떠나라
사람들 속에서 문득 내가 사라질 때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말을 잃어 갈 때
달려가도 멈춰서도 앞이 안 보일 때
그대 혼자서 여행을 떠나라
존재감이 시라질까 두려운가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충분한 존재감이다
여행올 떠날 땐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그러나 돌아올 땐 둘이 손잡고 오라
낯선 길에서 기다려온 또 다른 나를 만나
돌아올 땐 둘이서 손잡고 오라
-
다 아는 이야기
바닷가 마을 백사장을 산책하던
젊은 사업가들이 두런거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을인데
사람들이 너무 게을러 탈이죠
고깃배 옆에 느긋하게 누워서 담배를 물고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는 어부들에게
한심하다는 듯 사업가 한 명이 물었다
왜 고기를 안 잡는 거요?
“오늘 잡을 만큼은 다 잡았소”
날씨도 좋은데 왜 더 열심히 잡지 않나요?
“열심히 더 잡아서 뭘 하게요?”
돈을 벌어야지요, 그래야 모터 달린 배를 사서
더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잖소
그러면 당신은 돈을 모아큰 배를두 척, 세 척, 열 척,
선단을 거느리는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요
“그런 다음엔 뭘 하죠?’’
우리처럼 비행기를타고 이렇게 멋진 곳을 찾아
인생을 즐기는 거지요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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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착각
나만은 다르다
이번은 다르다
우리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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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길을 걸어라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거친 음식을 먹어라
야생의 대지에서 거칠게 자라난
야채와 곡식을 거친 상태로 먹고
햇살과 바람의 거친 땅을 걸어라
병을 달고 죽고 싶으면
부드러운 음식을 먹어라
횐 쌀과 흰 밀가루와 살찌운 고기를
부드럽게 가공한 상태로 먹고
편리한 도시공간을 바퀴로 달려라
인생에서 중요한 게 건강뿐일까
네 영혼도사랑도 마음의 평화도
거친 진실과 정의를 씹어 먹어라
거친 저항과 시련의 길을 함께 걸으라
-
평화를 해치는 나쁜 사람들 목을 쳐야 하나요?
기평아
예
내가 먼저 평화를 이루지 못한 사람은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갈 수 없단다
길을 잃거든 네 빳빳한 목을 쳐라!
그러면 평화다
어린 나는 온몸을 떨었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석 달 동안 배운 천자문
그보다 천배는 소중한 첫날의 가르침은
내가 길을 잃을 때마다 길이 되었으니
감옥에서 한 시대의 종언을 들으며
나는 침묵 삭발 절필로 내 굳은 목을 쳤고
자유의 몸이 되어 길을 잃고 길을 찾아 분투하면서
긴 침묵 정진으로 유명해진 내 이름 석 자의 목을 쳤고
국경 너머 전쟁터와 기아분쟁 현장으로 떠날 때마다
조용히 유서를 쓰면서 내 목을 쳐왔으니
수많은 세월이 지났어도 서당 입문 첫날
길을 잃거든 빳빳해진 네 목을 쳐라!
생생한 그 전율은 아직까지 내 안에 살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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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나큰 비움
안이 텅 빈
오래된 나무나
계곡이나
광야에는
뭔가 신령한 기운이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도
크나큰 침묵에 든 사람도
자신을 한 번 다 바친 사람도
크게 버리고 비운 것들에는
뭔가 영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
채우고 더하고 가질수록
사라지는 신령한 그 힘
비우고 나누고 바칠수록
차오르는 신성한 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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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감사
하늘은 나에게 영웅의 면모를 주지 않으셨다
그만한 키와 그만한 외모처럼
그만한 겸손을 지니고 살으라고
하늘은 나에게 고귀한 집안을 주지 않으셨다
힘 없고 가난한 자의 존엄으로
세계의 약자들을 빛내며 살아가라고
하늘은 나에게 신통력을 주지 않으셨다
상처받고 쓰러지고 깨어지면서
스스로 깨쳐가며 길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위대한 스승도 주지 않으셨다
노동하는 민초들 속에서 지혜를 구하고
최후까지 정진하는 배움의 사람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내 작은 성취마저 허물어 버리셨다
낡은 것을 버 리고 나날이 새로와지라고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
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
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내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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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에 서다
태양은 최고의 연출자
그 누가 이렇게 작은 것들을
최고의 주연으로 빛낼 수 있을까
눈부신 정오의 해 아래서는
존재조차 없던 작은 것들이
해 뜨는 아침이나 해질녘 그 짧은 순간에
지상의 눈부신 무대 위에서
당당한 주연의 대사를 발성한다
태양은 최고의 연출자
구멍 난 풀잎이건 하찮은 억새이건
가난한소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이건
세상의 높은 무대가 아닌
역광의 낮은 무대에 그를 우뚝 세우신다
그는 저 영원에서 비추는 듯한 역광을 받아
짧은 순간 자신의 존재를 장엄하게 드러낸다
역광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오는 빛인 것만 같다
아니 세상이 주는 빛을 거부하며
자기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빛
그 치명적인 사랑의 상처에서 비춰 나오는
영원으로 가는 빛의 통로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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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직하게 지불하고 따라야만 한다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생명과 죽음을 대비해
오늘 내 삶의 분량을 떼어서 주고 싶지 않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조차
남김없이 불사르며 다 살지 못한 것이 문제일 뿐
병이 오면 병과 동행하며 충만하게 사는 길이 있고
죽음이 오면 죽음을 반기며 그 품에 안겨
새로운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나에게는 삶도 죽음도 이미 충분하다
삶을 살 줄 모르는 자는 죽을 줄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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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의 뒷모습
자그로스 산맥을 걷다가
주르드 여자 게릴라를 만났다
기관총을 든 그녀는
자그만 몸매의 열일곱 니나였다
무거운 탄띠를 내려놓은 그녀는
암벽 에 붉게 핀 텔스랄레 한 송이를 꺾어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건넸다
나라는 달라도 우린 평화의 하발이라며
니나와 나는 바위 에 나란히 앉아
멀리 산 아래 사람 사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어린 나이 에 게릴라 생활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또래 소녀들처럼 예쁘게 꾸미고 데이트도 하고
평범하고 따뜻하게 사는 것이 그립지 않냐고
그녀는 텔스랄레처럼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말이 없었다
“인생은 좋은 것입니다.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살아야해요.”
이 말은 저를 구하려다 전사한 친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해준 말이 에요
그러니 전 잘 살아야 하고
전 아름답게 살아야 해요
친구들의 생명이 담긴 제 인생을
개인적 욕망으로 추하게 만들 수는 없어요
저에게 아름다운 삶이란
내가 나고 자란 이 땅에서 나답게 사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을 하고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총구 앞에 자신의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함께 우애롭게 나누며 사는 삶이에요
난 전사한 친구의 몫까지 아름답게 살아야 하고
이 땅에서 쿠르드인답게 살아야 하고
우리들 희망의 PKK답게 살아야 해요
그녀는 젖은 눈을 닦지도 않고 일어서서
무거운 탄띠를 차고 기관총을 손에 쥔 채
조용히 암벽 사이로 사라져 갔다
나는 자그로스 산맥의 8부 능선 길을 타고 가는
니나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인생의 갓길을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대맥길로 당당히 걸어가는
여윈 그녀의 등을 눈이 부시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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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꽃이 붉게 핀 논길을 고개 숙여 걸어갈 때
나랑 함께 놀래?
뒤에서 수줍게 웃고 있던 아이
전학 온 민지의 그 말 한마디에
세상의 젖은 길이 다 환한 꽃길이었네
돌아보니 멀고 험한 길을 걸어온 나에게
지옥은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홀로 걷는 길이었고
천국은 좋은 벗들과 함께 걷는 고난의 길이었네
나랑 함께 놀래?
그것이 내 인생의 모든 시이고
그것이 내 사랑의 모든 말이고
그것이 내 혁명의 모든 꿈이었네
-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시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혹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혹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둥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회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짧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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