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가을에 읽기 좋은 따스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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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고 전율이 일었던 박노해 시집.

본래 이름은 박기평인데, 스스로 고쳐썼다 한다.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하여'를 줄여 쓴 것.


전에 소개팅 자리에서 내 가방에 있는 책을 묻길래

박노해의 빨간책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소개해줬다.

시집에 관심을 가지던 소개팅 상대가

박노해의 이름 뜻을 알려주자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입술을 파르르 떨던 장면이 이상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그 정도의 임팩트였나,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됐던 박노해의 이름. 


여러 시인들의 고유한 특성이 있어서 줄세울 순 없지만,

개인적으로 윤동주 다음으로 내게 가장 와닿았던 시인이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선선해지니 전에 읽었던 시들이

내 안에서 꼬물꼬물거리길래, 다시 펼쳐들었다.

다시 내게 왔던 시들 중 몇개를 추려 정리한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국내도서

저자 : 박노해

출판 : 느린걸음 2010.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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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어 날이 선선해지니 전에 읽었던 시들이


내 안에서 꼬물꼬물거리길래, 다시 펼쳐들었다.


다시 내게 왔던 시들 중 몇개를 추려 정리한다.



ⓒcinemagraphs.com 

길이 끝나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 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수 없다 돌아서고 싶을 때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내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그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때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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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고독


한 시대의 악이

한 인물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의 저항은 

얼마나 괴롭고 행복한 시대였던가


한 시대의 악이

한 계급에 집약되어 있던 시절의 투쟁은 

얼마나 힘겹고 다행인 시대였던가


고통의 뿌리가 환히 보여

선과 악이 자명하던 시절의 자기결단은 

얼마나 슬프고 충만한 시대였던가


세계의 악이 공기처럼 떠다니는 시대

선악의 경계가 증발되어버린 시대

더 나쁜 악과 덜 나쁜 악이 경쟁하는 시대 

합법화된 민주화 시대의 저항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구조화된 삶의 고통이 전 지구에 걸쳐 

정교한 시스템으로 일상에 연결되어 작동되는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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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억압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고독하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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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마


너는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 

어느 날부터 경주마로 길러지고 

너는 지금 트랙을 달리고 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좋은 사료를 먹고 좋은 기수를 만나 

레이스에 앞서는 게 아니다


경주마가 할 일은

자신이 달리고 있는 곳이 결국 

트랙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트랙을 빠져나와

저 푸른 초원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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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graphs.com 

자기 삶의 연구자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가 나 자신을 연구하지 않으면 

다른 자들이 나를 연구한다네 

시장의 전문가와 지식장사꾼들이 

나를 소비자로 시청자로 유권자로 

내 꿈과 심리까지 연구해 써먹는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내 모든 행위가 CCTV에 찍히고 

전자결제와 통신기록으로 체크되듯 

내 가슴과 뇌 에는 나를 연구하는 

저들의 첨단 생체인식 센서가 박혀 있어 

내가 삶에서 한눈팔고 따라가는 순간 

삶은 창백하게 빠져나가고 만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고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네


최고의 삶의 기술은 언제나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들어내는 것


삶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네 

삶의 목적은 오직 삶 그 자체라네 

지금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우리가 이토록 고통받을 이유가 없다네


우리 모두는

자기 삶의 최고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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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팔아넘겨져서는 안 된다


씨앗으로 쓰려는 것은

그 해의 결실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만을 골라낸다


씨앗이 할 일은 단 두 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자리에 파묻혀 썩어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정직한 절망으로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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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와 저항


일상은 거대한 중력만 같아 

먹고 사는 건 끈질긴 굴레만 같아 

삶은 어디로 탈주했을까


생활 바깥에 뭔가 내가 살아야 할 

바람과 햇살과 떠돌이 별과 

거기 내가 만나야만 할 누군가 

울며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밤이 걸어올 때


하루하루 내 존재감이 사라져가고 

달릴수록 내 영혼이 증발되어가고 

탈출 같은 여행도 발작 같은 비판도 

솟구친 만큼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떨어지고 

일상의 속도와 불안과 두려움이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는 아침이 등을 떠밀 때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는 일상인가


내가 살아야 할 삶은 어디 에 있을까 

미아처럼 어느 골목 끝에서 울고 있을까

검은 숲에서 반인반수로 떠돌고 있을까


끈질긴 생활의 힘으로

강력한 일상의 힘으로

나에게는 생존의 굴레를 뚫고 삶으로 진입할 

치열한 탈주와 저항이 필요하다


끝내 별똥별처럼 추락할지라도 

대기권을 뚫고서 별과 입맞춤한 죄로 

지구에 떨어져 얼음 속의 꽃씨가 될지라도 

나와 같은 한 걸음의 또 다른 내가 필요하다


지금 나에겐 축적이 아닌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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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graphs.com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사람들은 하루아침 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별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하루아침 에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꽃도 별도 사람도 세력도

하루아침 에 떠오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좋아질 뿐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변함없이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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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로서 해줄 단 세 가지


무기 감옥에서 살아나올 때

이번 생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혁명가로서 철저하고 강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허약하고 결함이 많아서이다


하지만 기나긴 감옥 독방에서

나는 너무 아이를 갖고 싶어서

수많은 상상과 계획을 세우곤 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일체의 요구와 

그 어떤 교육도 하지 않기로 했다 

미래에서 온 내 아이 안에는 이미 

그 모든 씨앗들이 심겨져 있을 것이기에


내가 부모로서 해줄 것은 단 세 가지였다


첫째는 내 아이가 자연의 대지를 딛고 

동무들과 마음껏 뛰놀고 맘껏 잠자고 맘껏 해보며 

그 속에서 고유한 자기 개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자유로운 공기 속에 놓아두는 일이다


둘째는 ‘안 되는 건 안 된디’를 새겨주는 일이다

살생을 해서는 안 되고

약자단 괴롭혀서는 안 되고

물지를 낭비해서는 안 되고

거짓에 침묵동조해서는 안 된다

안 되는 건 안 된다! 는 것을

뺏속 깊이 새겨주는 일이다


셋째는 평생 가는 좋은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자기 앞가림은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습관과 

채식 위주로 뭐든 잘 먹고 많이 걷는 몸생활과 

늘 정돈된 몸가짐으로 예의를 지키는 습관과 

아름다움을 가려보고 감동할 줄 아는 능력과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홀로 고요히 머무는 습관과 

우애와 환대로 많이 웃는 습관을 물려주는 일이다


그러니 내 아이를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내가 먼저 잘 사는 것, 내 삶을 똑바로 사는 것이었다 

유일한 자신의 삶조차 자기 답게 살아가지 못한 자가 

미래에서 온 아이의 삶을 함부로 손대려 하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월권행위이기에


먼저 한 사람의 좋은 벗이 되고 

닮고 싶은 인생의 선배가 되고 

행여 내가 후진 존재가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끊임없이 배워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믿음의 침묵’으로 지켜보면서 

이 지구별 위를 잠시 동행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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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graphs.com 

필사적으로 꼴리기를


남자들은 위엄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남자의 전투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자들은 깊이를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의 남자들은

여자의 유약함을 지니게 되었다


슬픈 일이나 좋은 일이다


여자는 남자의 과거가 되지 말기를 

강인한 깊이로 새롭게 빛나기를


남자는 여자의 과거가 되지 말기를 

부드러운 위엄으로 새롭게 빛나기를


그리하여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기를


결코 같아지지 말고 닮아가지 말기를 

서로가 다름으로 필사적으로 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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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꽃


무너진 성벽이나

황량한 평원의 고인돌이나 

사라진 원주민의 돌집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불볕의 정적 속에서


오래된 돌들이 풍기는 향기 

그들이 두런거리는 소리 

돌에 감도는 붉은 실핏줄 

등짝의 근육과 처녀의 젖가슴


돌에서 꽃이 핀다


돌과 꽃 사이로 걸어 나올 때 

세상이 던지는 돌멩이 속에서 

돌이켜 재구성된 사람으로서의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돌을 던져라, 꽃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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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몸


비어가는 들녘이 보이는 

가을 언덕에 홀로 앉아 

빈 몸에 맑은 별 받는다


이 몸 안에

무엇이 익어 가느라

이리 아픈가


이 몸 안에 

무엇이 비워 가느라 

이리 쓸쓸한가


이 몸 안에 

무엇이 태어나느라 

이리 몸부림인가


가을 나무들은 제 몸을 열어 

지상의 식구들에게 열매를 떨구고 

억새 바람은 가자 가자 

여윈 어깨를 떠미는데


가을이 물들어서 

빛바래 가는 이 몸에

무슨 빛 하나 깨어나느라

이리 아픈가

이리 슬픈가


-


길어져서 2부로 ->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탄 가을에 읽기 좋은 따스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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