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창 낭송, 목소리, 낭독에 대해 관심이 부쩍 많아졌었는데
신간코너에서 눈에 띈 책! 1달도 안된 아주 따끈따끈한 책이다.
따끈한 책을 읽으면 괜히 기분이 좋다.
평소 인문학으로 저자의 이름을 오며가며 많이 봤었는데,
(몇 권 읽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맘 잡고 읽는거는 처음인 듯하다.
내용도 다 좋은데, 읽으면 읽을수록 아, 아깝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렇게 박학다식한 융합의 대가가 왜 이런 철학적인 질문을 하면서
본질은 살짝씩 빗겨나갈까, 왜 살짝 깨작하다가 다른 결론이 나 버리는 걸까.
아쉽고 아깝다.
어쨌거나, 고미숙 작가님의 글은 읽는 독자도
덩달아 유식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어려운 말들을 쉽게 풀이하면서도 그 요소들을
재미있게 탁월하게 엮어내는 능력이 참 뛰어나신 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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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말함으로써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그들 내부의 독소를 방출하고 새로운 에너지가 들어오게 해준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을 때,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은 내부에 머물게 되고, 그들의 삶을 오염시킨다. 노래하고, 춤추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아이의 영혼과 목소리를 해방시켜 주는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아이가 말하도록 귀를 기울여 주고 격려하는 것이다.(서정록, <잃어버린 지혜, 듣기>, 130~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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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구술문화의 시대라 낭독이 대세였다. 묵독은 책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스어의 경우(독서가) "씌어진 모든 것은 그 자체만으로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완전해지려면 읽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
(소리내어 읽고 싶은데 막상 그럴 장소가 너무 없다는 게 새삼 요즘 많이 느끼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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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꼭 섭취해야 할 물이 있듯이, 말과 소리에도 하루에 듣고, 해야 할 정량이 있다. 그걸 충족하지 못하면 에너지가 안에서 고이고 뭉친다.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미친 듯이 춤을 춘다고 해소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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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외는 것이다. 다 외워야 낭송이 가능하다. 암송은 소리로써 텍스트를 몸 안에 새기는 행위다. 다 왼 다음엔 텍스트를 버려도 된다. 즉,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되 궁극적으로 텍스트를 떠나는 것이다. 떠날 수 있으면, 다시 말해 텍스트 없이도 내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올 수 있으면, 이제 몸이 자유로워진다. 그러면 마크 트웨인처럼 무수한 변주가 가능하다. 연극적 재현도, 구성진 서사도, 유쾌한 입담도 얼마든지 가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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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는데도 낭송을 필수적이다. 각국의 언어들은 고유한 주파수 패턴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해서, 외국어를 배우려면 그 외국어의 주파수와 공명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신체의 변용을 의미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시 소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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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언어의 크기가 곧 내 삶의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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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살아 숨쉬게 해야 한다. 고전을 낭송하는 건 아주 구체적이면서 또 신체적인 활동이다. 말을 하려면 입과 귀를 써야 한다. 고전의 낱말과 문장들은 늘 새롭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그만큼 텍스트 안에 다양한 힘들이 흘러다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새로움을 뇌가 가장 즐거워한다. 따지고 보면, 고수가 되는 길도, 치매를 예방하는 길도 별 게 없다. 로고스를 일상적으로 훈련하는 것뿐. 그 로고스의 진동을 기혈과 근육과 뼈에 새기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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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은 리듬이다. 리듬을 어떻게 일상화할 것인가? 신체가 리듬을 타려면 역시 몸을 써야 한다. 가장 좋은 몸쓰기가 바로 걷기다. 거리든 골목이든 산이든 숲이든 걸을 수 있는 곳은 무조건 걸어라. 걷기는 인간의 권리이자 또 즐거운 놀이다. 성찰과 친교가 동시에 가능한 활동이다. 실연이나 사별로 가슴이 터질 것 같거나, 억울함과 분노가 뼈에 사무칠 땐 일단 걸어라. 걸으면 발의 속도와 리듬이 호흡을 조율해 준다.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것도 서재가 아니라 길 위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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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참 이상하다. 성공을 향한 배팅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데도 그걸 희망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가야할 보편적 코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하냐?'며 시큰둥해하거나 되려 화를 낸다. 고전에서 만나는 멘토들은 다 비슷한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건 특별한 재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멘토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닌 슈퍼맨이 아니라 자기 배려의 달인인 셈이다. 그렇다면 당장 그렇게 살면 된다. 요컨대, 자기의 삶을 고귀하게 하는 행위, 거기에는 외모도 스펙도 재능도 필요없다. 그저 매일매일의 실천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또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삶이 바뀐단 말인가? 늘 한방에 도약하는 걸 꿈꾸다 보니 일상이 삶의 현장이라는걸 망각한 것이다. 삶의 현장은 몸이고, 몸은 일상 속에서만 현존한다. 일상을 떠난 몸, 일상을 떠난 삶은 없다. 그리고 일상은 언제나 '오늘 하루'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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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산란할 때 묵독을 하면 한 단락도 집중하기 어렵다. 낭독은 그보다는 조금 낫지만 그 또한 한계가 있다. 그래서 낭송을 해야 한다. 생각과 말, 머리와 입을 일치시키는 연습, 그것이 곧 낭송이다. 낭송이 일상화되면 자연스럽게 쾌락에 미혹되지 않는다. 욕망의 지도가 바뀌기 때문이다. 쾌락의 미혹에서 진리에의 열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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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큐라스에겐 세 가지 구호가 있다. 낭랑하게 낭송하라! 필사적으로 필사하라! 글로벌하게 글쓰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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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주인이 되는 길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배운이 있다. 지식과 지성, 지혜. 지식이 정보라면, 지성은 정보의 네트워크, 지혜는 삶과 죽음에 대한 탐구, 곧 영성에 해당한다. 이걸 관통하는 이치를 진리라고 부른다. 우리 시대는 이 세 가지가 낱낱이 분리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삶 또한 분리 된다. 삶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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