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반응형
728x170

대박 

CS루이스 아저씨에 버금가는 변증론을 펼치시는 

엄청난 내공의 심리치료사 스캇 펙과의 만남.

와 완전 읽는 내내 찌릿찌릿 

이런 책을 이제야 알다니 ㅠㅠ 

아니, 이제라도 읽게되어 감사하다, 진짜!

두고두고 내 곁에서 조언해 줄 만한 든든한 동지같은 책

말로 설명하면 너무 길어질테니까, 그냥 바로 본문으로 ㄱㄱ



아직도 가야 할 길

저자
M. 스캇 펙 지음
출판사
율리시즈 | 2011-02-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전 세계 23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출간 13년간 [뉴욕타임스]...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
“신경증(노이로제)이란 마땅이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칼 융)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피하려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진다. 신경증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과 문제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신경증은 더욱더 쌓인다.

-
부모가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
어릴 때는 비교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어린 눈에 비친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다. 만일 부모가 하루하루 자제하고 조심스럽고 품위 있게 행동하고 질서 정연한 생활 능력을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마음속 깊이 이것이 사는 방식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이 가치 있다는 의미이고, 어떤 것이 가치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시간을 투자한다. 그것을 즐기고 그것을 돌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녀를 사랑할 때도 이와 같다. 우리는 아이들을 감탄하면서 바라보고 돌보며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시간을 주는 것이다. 제대로 훈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부모는 아이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것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면서, 결정을 내릴 때 괴로워하고 말 그대로 아이와 고통을 함께한다. 아이들은 맹인이 아니다. 부모가 자기와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을 알고 당장 고마움을 표시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아이들 역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부모님이 기꺼이 나와 함께 고통을 받고 있으니 고통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거야. 나도 기꺼이 괴로움을 견뎌야지”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기 절제의 시작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치는 시간의 질과 양이, 아이에게는 자신이 부모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이 느낌은 자기 절제의 초석이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면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돌보게 된다. 자기 절제는 스스로 자신을 돌본다는 것이다. 

즐거움을 나중으로 미루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아이들은 스스로 훈육할 줄 아는 역할 모델과 자기 존중감이 있어야 하고 존재의 안전함을 신뢰해야 한다. 이러한 ‘자산들’은 부모의 자기 절제와 순수하고 일관된 보살핌을 통해서 획득된다. 이것이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다.

-
시간을 낼 마음만 있다면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이것(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지은이)은 내 선택이었지 내가 저주를 받은 것도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무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또한 이제 나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결함 없는 어떤 이도 기꺼이 시간을 낼 마음만 있다면 무슨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주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지 않았던 나처럼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지적, 사회적,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
신경증과 성격장애
신경증인 사람들은 “꼭 해야 했는데”, “마땅히 하는 게 좋은데”, “해서는 안 되는데”와 같은 표현들을 즐겨 쓴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을 항상 수준 미달이고 늘 엉뚱한 선택을 하는 열등한 존재로 자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성격 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었어”, “이렇게 해야만 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와 같은 표현을 심하게 사용한다. 이는 자신은 선택권이 전혀 없는 사람이고 자기 행동은 전적으로 자기 능력 밖에 있는 외부의 힘에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짐작할 수 있듯이 신경증인 사람들은 성격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 비해 치료가 쉽다.
(내가 성격장애 쪽이고, 희서는 신경증 쪽)

-
자유로부터의 도피
내가 일에 열심힌 것은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었고 내가 정한 우선순위였다. (…)원하면 그들처럼 지낼 수 있는 완벽한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그들이 나와 다른 스타일을 선택했다고 그들에게 화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그들과 다르게 지내고자 한 내 선택에 화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나는 내 선택에 만족하고 있었다.

-
현실을 바로 보고 바로 인식하는 것
세상의 현실을 명확하게 바라볼수록 세상에 대처할 준비를 더 잘할 수 있다. 세상의 현실을 덜 명확하게 바라볼수록, 다시 말해 우리의 정신이 거짓과 오해와 환상으로 혼란스러워질수록 올바르게 처신하고 현명하게 결정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현실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삶의 영역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지도와 같다. 지도가 진실하고 정확하면 기본적으로 우리의 현재 외치를 알게 될 것이고, 가고 싶은 곳이 정해질 때 그곳에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지도가 잘못돼있고 부정확하다면 대개 길을 잃을 것이다. 

진실이나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 사람들은 이를 피하게 마련이다.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절제력이 있을 대만이 지도를 수정할 수 있다. 이러한 절제력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진실에 전적으로 충실해야 한다. 이 말은 진실이 우리의 편안함보다는 이익을 위해 더 중요하고 절대적임을 믿어야 한다는 의미다. 역으로 표현하면 항상 개인적 불편함은 중요하지 않다 여겨야 하며,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심지어 그것을 반겨야 한다. 정신 건강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실에 충실하는 진행형의 과정이다.

-
과감한 도전: 자기 성찰의 길
또한 진실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생활이란 자진해서 다가오는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생활을 말한다. 우리가 가진 현실에 대한 지도가 정말 유효한지 확인해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지도 제작자들의 비판과 도전을 받을 수 있게 자기 지도를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꽉 막힌 세계 안에서 살게 된다.
(오 나한테 지금 딱딱 필요한 말!! 내 지도를 펼쳐 보이는 것! 다른 제작자들의 지도와 비교해볼 수 있게!)

-
균형잡기
성숙한 정신 건강에 필요한 것은 상충되는 요구, 목적, 의무, 책임, 목표 같은 것들 사이에서 융통성 있게 균형을 잡고 계속해서 이를 조정해나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이러한 균형 잡기라는 훈육에서 근본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은 ‘포기’다.

-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더 많이 얻는다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인간 존재는 가장 황홀하고, 영구적이고, 확고하며 무한한 인생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삶에 모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다. 이러한 ‘비밀’이 종교의 핵심 지혜다. 자신을 포기하는 과정이란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완만히 이루어지는 점진적 과정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적응하고 새로 시작하고 다시 적응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어떠한 형태의 일시적 자기 포기라도 그것에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포기를 실천하는 것은 성인기에 중요한 것을 배우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훌쩍 성장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
1과 정리
훈육이란 문제 해결의 고통을 피하는 대신, 문제 해결의 고통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생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즉, 즐거운 일을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와 현실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훈육을 이런 기술들의 ‘체계’라고 하는 이유는 이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기술들을 사용할 힘과 에너지와 의지는 사랑이 제공한다. 

-
사랑이란 무엇인가
나는 사랑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울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라고 정의한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개인의 한계나 경계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자아 경계의 붕괴다. 개인의 한계를 확장시키는 데는 반드시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일에는 노력이 필요 없다. 그 누구도 그 경험 때문에 더 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 번 확장되거나 늘어난 한계는 늘어난 상태를 유지한다. 참사랑은 영원히 자신을 확대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렇지 않다.

-
사랑은 자아 영역을 확대하는 것
수년간의 사랑, 애착을 위한 한계 확장은 결국 무엇을 가져다줄까? 그것은 점진적이고도 발전적인 자아의 확장,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의 통합, 이에 따른 자아 경계의 성장과 확장과 약화를 연쇄적으로 가져다 준다. 이렇게 더 많이, 더 오랫동안 자아를 확장해 나가면 나갈수록 사랑은 더 깊어지고 자아와 세계의 구별은 더욱 불투명해진다.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동일시하게 된다. 이렇게 자가 경계가 불투명해지고 얇아지면, 경계는 부분적으로 붕괴되고 ‘사랑에 빠질’ 때 같은 종류의 황홀감을 더욱더 체험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대상과 일시적이고 비현실적으로 결합하는 대신, 세상의 많은 것들과 현실적이고 더욱 영속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이러한 결합에서 느껴지는 황홀이나 희열은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 자극적이지 않고 극적인 느낌도 덜하지만 그 대신 더욱 안정되고 지속적이며 결국 만족스럽다. 
(사랑을 통한 자아 성장의 최종 지향점! 기억해두자)

짧고 쉬운 지름길은 없다. 자아 경계는 부드러워지기 전에 먼저 굳어져야만 한다. 그리고 자아를 초월하기 전에 자아가 확립되어야 한다. 자아를 잃어버리기 전에 먼저 자아를 발견해야 한다. 열반, 지속적인 깨달음, 진정한 정신적인 성장 등은 오로지 참사랑을 부단히 실천함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
의존성을 경계하라
“건전한 결혼은 오직 강하고 독립적인 두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단순히 거저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분별 있게’ 주고, 마찬가지로 분별 있게 주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분별 있게 칭찬하고, 분별 있게 비판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과 더불어 분별 있게 논쟁하고, 싸우고, 맞서고, 몰아대고, 밀고 당기는 것이다. 그것은 리더십이다. 분별 있다는 것은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며, 판단은 본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심사숙고해야 하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필요로 한다.

-
사랑은 자기 희생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사랑의 느낌이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느낌이 없을 때도 사랑하려는 의지와 헌신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으며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참사랑과 사랑의 느낌을 혼동하는 성향에는 스스로를 위안하려는 성질이 내포되어 있다. 느낌 안에서 사랑의 증거를 찾는 것은 쉽고 즐겁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대체로 경험적인 사랑의 느낌이나 애착을 초월하므로, “사랑이란 행위로 표현될 때 사랑이다”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다.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은 선과 악처럼 객관적인 것이지 순전히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다.

-
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이 사랑
존중이 존중을 창조하고 사랑이 사랑을 낳는다. 딴 생각을 하면서 아이와 짝짜꿍을 잘할 수는 없다. 만약 반쯤 정신을 딴 데 팔면서 짝짜꿍을 한다면, 반쯤은 정신이 딴 데 가있는 산만한 아이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온전한 자아와 심리적 독립과 고유한 개성이라는 미지의 세계로 도약할 때만이 사람은 자유로이 정신적 성숙을 향해 더 숭고한 길을 따라 전진하여 가장 높은 차원에서 사랑을 보여줄 수 있다. 결혼하는 것이나 직업을 갖는 것이나 아이를 갖는 것이 부모나 다른 사람의 기대 또는 사회 전체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얄팍한 행동이 될 것이다. 가장 지고한 사랑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이며, 이는 순응하는 행위가 아니다.
(마지막 문장 완전!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비로움)

변화하고 성장하는 고통을 이겨내겠다는 의지가 없고, 성장하는 아이에게서 배울 의사가 없는 부모는 부지불식간에 노쇠의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와 세상은 그런 부모를 저 멀리 뒤에 남겨놓을 것이다. 아이에게서 배운다는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의미 있는 노년을 준비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다. 슬프게도 대부분은 이러한 기회를 잡지 않는다.

-
사랑이라는 모험: 충고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의 개성과 나와 다름을 존중하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옳고, 너는 잘못됐다. 너한테 무엇이 좋은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라고 생각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듯이 때로 누군가 상대방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더 잘 알고 당면 문제에 관해 더 우월한 지식이나 지혜를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럴 때에는 둘 중 더 지혜로운 사람이 상대방의 문제를 일깨워줄 의무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당위성 뒤에 숨겨진 동기가 어떤 것인지 엄중하게 점검해야 한다. “내가 정말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애매한 짐작만으로 이러는 걸까? 정말 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선택한 길이 현명한 것인데도 그렇지 않다고 보는 생각은 나만의 편협한 관점이 아닐까? 내 사랑이 새로운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게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등등. 이러한 것은 모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자문해야 할 질문이다. 이렇게 가능한 객관적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는 것은 겸손이나 온유의 본질이다.
(특히 부부관계에 있어서의 충고)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를 위해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안다고 확신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가치관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확신이 서면, 그 다음에는 아이의 성격과 능력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칭찬을 한다든지, 관심을 높인다든지, 이야기를 한다든지 또는 다른 형태의 영향력보다는 직접 충고하는 것에 아이가 더 호의적으로 반응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더 겸손해진다. 그런데 겸손해질수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오만해질까 봐 더 두려워진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내가 무엇이기에 인간사를 좌우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권한이 있기에 아이, 남편, 우리나라 또는 인류에 대해 무엇이 최선인지 감히 결정할 수 있나?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 행세를 하는가? 바로 이것이 위험이다.

-
사랑은 훈육되는 것
나는 자주 환자들에게 감정은 그들의 노예이며, 자기 훈육의 기술은 노예를 소유하는 기술과 같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째 인간의 감정은 에너지의 원천이다. 감정은 일상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노동력, 다시 말해 노예의 노동력을 제공한다. 감정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므로 우리는 감정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적절하게 다루는 데에는 복잡하지만 균형 잡힌 중용의 길이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판단과 지속적인 조절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주인은 그의 감정을 존중하고 좋은 음식, 집, 의료 혜택 등을 제공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대답해주며, 격려하고, 건강을 걱정하면서 규율을 정해주고, 규제하며, 분명한 의사결정도 해주고, 방향을 다시 잡아주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면서, 더불어 누가 윗사람인가를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히 해준다. 이것이 건전한 자기 훈육의 길이다. 

-
사랑은 정신치료다
배우자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부모, 아이, 친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또 그들의 영적 성장을 지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확장시킨다면 우리가 그들에게 심리 치료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부릴 수 있는 모든 재주를 총동원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것을 가릋주고, 내 힘이 닿는 한 정신적인 성장의 여정에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그것을 잡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친구,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 또는 좋은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때로는 빗나가는 비판일수도 있고, 어른처럼 사려 깊은 충고가 아닐지라도 나는 내 아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아내도 내가 그녀를 이끌어주는 만큼 나를 이끈다. 내가 택한 길이 현명한지 안전한지, 애정 어린 관심을 갖고 솔직히 반대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친구를 친구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
사랑이라는 미스터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내 눈 앞에 알몸을 보였을 때 전신을 관통한 느낌, 그것은 경외였다. 왜 그랬을가? 만약 성이 본능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라면 왜 나는 ‘흥분한다’거나 욕망의 굶주림만을 느끼지 않았을까? 단순한 욕망의 굶주림만으로도 인류의 번식은 충분히 보장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경외감이 들었을까? 성이 왜 존경의 느낌과 복잡하게 얽혀 있단 말인가? 또한 무엇이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것일까?

-
서로 다른 우주의 세계관, 그리고 종교
인생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는 폭과 깊이에는 사람들마다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편차가 존재한다. 이러한 이해가 곧 종교다. 즉,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성격에 관한 첫째 견해는 바로 부모의 성격을 투사한 것 또는 부모의 성격을 혼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가끔 환자의 ‘최초 기억’에서 어린 시절의 본질과 그에 따른 세계관을 파악해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어린 시절의 본질을 상징하는 정확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런 최초의 기억들은 환자의 가슴 깊이 숨어 있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정확히 일치한다.) 종교관이나 세계관은 대부분 특수한 어린 시절의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부모의 종교에 반항하고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그 세계관이 우리가 능력껏 성취할 수 있는 세계관보다 더 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경험을 충분히 잘 이용하고, 여기에 성인의 경험과 또 앞으로의 신세대 경험까지 추가되면 우리는 더 넓은 세계관을 갖게 된다. 완전한 형태로 대물림되는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생동적이며, 가능한한 최선의 것이 되기 위해 종교는 철저하게 개인적이어야만 한다. 이 말은 현실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경험하면서 불처럼 타오르는 회의와 의문을 통해 빚어지고 굳어진 개인적인 것이라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
우연한 깨달음이라는 기적
행운을 가져다주는 초자연적인 사건과 관련해 말하고 싶은 것은 ‘우연한 깨달음serendipity’이라는 현상이다. 웹스터 사전에는 우연한 깨달음을 ‘가치 있거나 호감이 가는 것을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찾아내는 재능’이라고 정의한다. 은총은 일부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소중하고 바람직한 것’에 의해 나타나며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용하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4부(은총)의 주제다.

나는 은총을 입었다. 그 사건은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하다.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껴지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이렇게 전혀 일어날 것 같이 않은 은혜로운 사건들이 실제로 주변에서 늘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평범하다. 내게 이런 일은 늘 일어나고 있다. 어떤 것은 의식하고, 어떤 것은 기적 같은 본질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받는다. 내가 그중 얼마나 많은 것들을 스쳐 보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
은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부분적으로나마 끊임없이 무의식과 상호 침투하듯 우리의 무의식도 우리 바깥에 있는 ‘정신’에 침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스며드는 그 ‘정신’은 개체로서 우리가 아니다. “우리 몸을 감싸주는 것은 옷, 살을 감싸는 것은 피부, 뼈를 감싸는 것은 살이며, 심장을 감싸는 것은 온몸이듯, 우리의 육신과 영혼은 하나님의 자비에 감싸여 있다. 더구나 훨씬 더 포근하게, 모든 물질적인 것은 언젠가는 낡아서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언제나 온전하다.”(<거룩한 사랑의 징후>, 그레이스 워렉 편)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드높인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 또한 드높인다. 자아의 확장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진화의 행위다. 그것도 진행 중인 진화다. 모든 생명체에 존재하는 진화의 힘은 인간의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인류 앞에 자신을 드러낸다. 인간애 중에서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이다. 

-
알파와 오메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접근하더라도, 사랑을 베푸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가정하고 그것을 진지하게 탐구하다 보면 결국은 한 가지 무서운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은 알파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다. 하나님은 시작과 끝이다. 이는 굉장히 오래된 관념이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공포 때문에 이 생각을 외면해왔다. 어떠한 관념도 이보다 더 무겁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은 없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상이다. 그것이 심오하고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믿는 즉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 바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시도할 의무를 지운다.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버리기만 하면, 영적 성장을 근심할 필요도, 우리 자신의 의식 수준을 높이려고 애쓸 필요도, 사랑을 실천할 필요도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주어진 인간으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때야말로 “자, 일을 끝냈어. 목적을 이룬거야”라고 말하며 쉴 수는 절대로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고 더욱 현명해지도록 밀고 끌어올려야 한다. 이 믿음을 따르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하기를 게을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신처럼 성장하도록 인간을 적극적으로 양육한다는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게으름에 직면하게 한다.
(이 부분이 아주 핵심 포인트.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는 아웃라인. 와우)

-
엔트로피, 게으름 그리고 원죄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다면 다른 모든 장애물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1부 ‘훈육’에서는 꼭 필요한 고통을 피하려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을 살펴보았다. 2부 ‘사랑’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게으름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그들은 율법 뒤에 숨은 이유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직접 도전하지도 않고, 어른답게 대화해보지도 않고서 그냥 율법을 깨뜨려버렸다. 왜 유혹당하고 행동에 옮기기까지 그들은 아무일도 하지 않았을까? 죄의 본질은 바로 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있다. 즉, 논쟁의 단계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뱀과 하나님 사이에 논쟁을 붙였어야 했다. 마음속에서 선과 악 사이의 논쟁을 붙여보려고 하지 않는 - 또는 힘을 다하여 싸우지 않는 -그 태도가 바로 죄를 짓는 원인이다. 원죄는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모든 두려움이 다 게으름은 아니지만 두려움 가운데 상당 부분은 게으름이 원인이다. 즉, 현실을 변화시키는 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다 성장한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을 잘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덜 게으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숙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다. 새롭고 건설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멈칫거리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런 귀중한 생각들을 무심코 흘려보내고는 어떻게 할지 당황해하며 이것들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고 있음을 깨달으면 영 내키지 않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애쓴다. 엔트로피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
악이란 무엇인가
악한이 빛을 싫어하는 이유는 빛이 그들의 모습을 스스로에게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을 싫어한다. 그드의 악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을 싫어한다. 그들의 게으름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자각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빛과 선과 사랑을 파괴한다. 보통의 게으름이란 그저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악한은 게으름을 유지하고 병든 자아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능력이 닿는 한 무엇이든 행동에 옮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키우기보다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실제로 남을 파괴하게 된다. 

엔트로피는 거대한 힘인 반면, 가장 극단적인 악의 형태로 그것이 사회적인 힘으로 쓰일 때는 이상하게도 무능해진다. 나는 악의 세력이 수많은 어린이들의 정신과 영혼을 악랄하게 공격하고 확실히 파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악은 인간의 진화라는 큰 흐름에 발동을 걸어 주기도 한다. 악이 파괴하는 각각의 영혼 때문에 악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우리 대부분은 은총으로 말미암아 악의 잔인함에 거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 악에 대한 자각은 우리 자신을 정화시키는 출발 신호다. 예컨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악이었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분을 멀리서도 볼 수 있다.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직접 싸움에 가담하는 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 중 하나다.
(읽다가 소름. 소리내서 놀랐던 부분)

-
의식의 진화
무의식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다. 그러므로 영적 상장의 목표는 의식적 자아가 신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할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을 지닌 채로 하나님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무의식의 하나님이라는 뿌리에서 자라난 의식의 새싹이 하나님 그자체로 상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인간 개체의 존재 이유다. 의식은 존재 전체 중 실천하는 부분이다.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의식이다. 완전히 무의식적인 존재란 갓 태어난 어린 아기와 같아서 하나님과 함께 있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이 부분도 두번째 핵심! 의식을 가지고 무의식의 속한 영역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 영적 상장, 엔트로피에 반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평생 훈련하는 것이라고 ㅠㅠ)

우리가 자립할 수 있는 성인으로서 세상에 영향을 미칠 독자적 선택의 능력이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의 성숙한 자유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를 통해 새롭고도 강인한 삶의 형태를 보여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요, 그분의 오른팔이요, 그분의 일부가 될 것이다. 의식적 결정을 통해 이 세상이 그분의 의지에 따르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 은총의 대행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하나님의 은총의 한 형태가 될 것이고, 인간 속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며, 사랑이 없던 곳에 사랑을 심고, 이웃을 우리와 같은 수준의 앎으로 인도하며, 인류의 진보 수준을 끌어올릴 것이다.
(궁극적인 목표)

-
권력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순간에 자기가 하는 일을 거의 알지 못하면서 어떤 결정을 내린다. 그들은 동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로 또 자기 선택의 결과를 알아보려고도 않고 행동에 들어간다. 자녀 양육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확신에 차 있을 때 오히려 어둠 속에 있고, 가장 혼란스럽다고 생각될 때 오히려 빛 속에 있을 때가 많다는 뜻이다.

위대한 앎은 천천히 조금씩 오며, 그 조금이라는 것도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다. 영적 성장의 길은 평생 걸리는 배움의 길이다. 열심히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식의 조각들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우리는 점차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고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일인지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힘을 경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쁜 일이다. 어떤 일을 정통했을 때 오는 기쁨이 있다. 영적으로 완전히 성숙한 사람은 인생의 전문가다. 그러나 또 다른 더 큰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감하는 즐거움이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런 단계의 영적 성장과 위대한 인식 상태에 도달한 사람들은 언제나 즐겁고 겸손하다. 그들은 자신의 비범한 지혜는 무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무의식이라는 뿌리와 자신이 연결된 통로를 유념하고 있으며 그 통로를 따라 지식이 뿌리로부터 흘러온다는 것도 잘 안다. 배우려는 노력은 바로 이 연결 통로를 열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것은 내 권능이 아닙니다. 내가 지닌 이 작은 권능은 보다 위대한 힘의 조그만 표현일 따름이지요. 나는 단지 일종의 통로일 뿐, 이것은 결코 나의 힘이 아닙니다.” 이러한 겸손은 유쾌하다.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깨달음 덕분에 진정으로 힘 있는 사람은 자아의 축소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더욱 더 많은 자료를 흡수하고 이를 결정에 반영해야 한다. 많은 것을 알수록 결정 내리기는 복잡해진다. 그러나 알면 알수록 결과를 예측하기는 쉬워진다. 결과가 어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책임을 떠맡는다면, 그 일의 복잡함에 압도되어 무력증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행위다. 그러므로 영적인 힘이란 단순한 앎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더 위대한 앎의 경지로 나아가면서도 여전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권능이란 모든 것을 다 알면서 결정을 내리는 힘이다.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분의 고뇌를 함께 나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하나씩만 열어주시는 이유 중에 가장 놀라운 이유인 것 같음)

권력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고독이다. (외로움은 어느 수준에서든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는 상태다. 힘이 있는 사람은 그와 대화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외로울 틈이 없고 오히려 외로움이 그리울 수도 있다. 그런데 고독은 같은 인식 수준에서 대화할 사람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종류의 고독은 영적 성장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앞서간 자라면 모두가 겪는 것이다. 이웃에서 점점 멀어짐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는 점점 밀접해진다는 즐거움이 없다면 감당해내기 힘든 짐이다. 의식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교감 속에는 우리를 지탱시켜주고도 남을 즐거움이 있다.
(백만마디 말보다 위로)

-
은총과 정신 질환: 오레스테스의 신화
퓨리스는 아트레우스 가문에 떨어진 원초적 저주의 피할 수 없는 결과였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죄가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듯 정신 질환도 부모와 조부모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문제임을 상징한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는 마땅히 그럴 수 있었는데도 부모와 할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런 한편 신들이나 ‘운명’도 탓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상황을 자기 스스로 만든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치유되었다. 이 치유 과정은 자기 노력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를 괴롭혀온 바로 그것은 지혜를 주는 것으로 변화되었다. 정신 질환을 직면하고 전적으로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치유에 성공해, 어린 시절과 선조로부터 비롯된 저주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한때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된다. 한때는 위험천만의 장애였던 것이 이제는 멋진 도전이 된다. 

-
은총에 저항하는 사람들
왜 어떤 사람은 최고의 실력과 애정 넘치는 처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치료되지 못하는가? 또 왜 어떤 사람은 정신 치료의 도움과 무관하게 어린 시절의 심한 애정 결핍을 극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되는가? 사람들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즉 성장하려는 의지는 어린시절의 부모의 사랑뿐 아니라 삶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인 은총에 의해서도 자라난다는 것을 나는 믿게 되었다. 은총은 의식 세계 바깥에 있는 강력한 힘으로서 무의식이라는 대리자뿐만 아니라 부모, 그 외에 사랑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작용하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온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생각남)

그렇다면 그토록 소수의 사람만이 부모에게서 기인한 환경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진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믿기로는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우리 대부분은 은총의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 도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은총의 부름을 받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 기울인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총에 저항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즉, 우리 모두에게 저주로 내려진 엔트로피라는 원죄다. 
(아 진짜 너무 명쾌하다)

우리 대부분은 어린이나 청소년처럼 어른다움에 따르는 자유와 권력이 우리 것임을 알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과 자기 훈육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 외에는 탓할 사람이 없는 그런 권력의 정상에 올라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이미 말했다시피 그 정상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독에 질려버릴 것이다.

-
은총을 맞이하기 위하여
(은총이 영적 성장이라는 여행에서 주는 세 가지 유익) 우선 은총을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것이며, 보다 확실한 방향 감각을 주고, 용기를 복돋워줄 것이다.

수동성과 의존성,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가야 할 길을 소속들이 미리 보기를 원하며, 매 발걸음이 안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말이나 은총의 조력이 유용하긴 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 한다. 어떠한 스승도 당신을 거기에 데려다줄 수 없다. 확고한 공식도 없다. 종교 의례는 배움을 위한 보조수단이지 배움 자체는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더라도, 영적 성장을 향한 여행은 너무나 외롭고 어려워서 우리는 종종 낙담한다.

은총이 실재하고 있음을 일단 깨닫기만 한다면 자신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생각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과 의식적 의지를 넘어 성장과 진보를 돕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자신을 온통 뒤죽박죽 하찮은 존재로 여기는 생각을 뒤집어엎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힘의 존재는 -우리가 일단 그 존재를 깨닫기만 하면 - 인간의 영적 성장이 인간 자신보다 더 위대한 어떤 존재에게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신시켜준다. 이 어떤 존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 부른다. 은총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실재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가 개개인의 영혼이 성장하는 데 쏠려 있다는 사실에 관한 명백한 증거다.
(너무 완벽해서 더할 나위 없는 결론과 책의 마무리)




반응형

Nowhere Cafe

삶을 풍요롭게하는 덕질을 추구합니다

    이미지 맵

    Library/Book 다른 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