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그림에 빠져 물건을 수집한 뒤 그 물건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그리는, 확실한 취향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 오연경씨. 섬세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키치하며, 환상적인 컬러 조합으로 정리되는 그녀의 일러스트는 잡화(雜貨)의 결과다.
기자 입장에서 인터뷰하기 가장 부담스러운 대상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동종 업계의 사람들. 적어도 이 기사를 쓰는 기자에겐 그렇다. 게다가 한참 선배라면 긴장감은 더 고조된다. 일러스트레이터 오연경씨(39)는 바로 그런 인터뷰이다. 기자가 중학교 시절 즐겨 보던 「키키」와 「쎄씨」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선배인 것. 지금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해도 편하게 말을 섞을 수 없는 꽤나 '높은' 선배다. 기자와 인터뷰이의 관계로 만난다 하더라도 그녀의 눈에 후배 기자가 현장에서 어떻게 진행을 하는지, 인터뷰를 어떻게 이끌어나가는지 스캔될 것이라는 부담에 전화하기를 몇 차례 망설이기도 했다.
1 잡지기자 출신답게 여전히 잡지를 즐겨 보는 오연경 작가. 잡지 속 수많은 패션·뷰티 제품 역시 일러스트 소재가 된다.
그럼에도 오연경 작가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얼마 전 출간된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미메시스)이라는 그녀의 책 때문이다. 첫 번째는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걸리시하면서 또 적당히 팝아트적인 느낌도 난다. 개인적으로 기자의 취향을 저격한 듯한 이런 일러스트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슈즈, 백, 텀블러 등 다양한 물건을 수집하는 컬렉터를 만나봤지만 오 작가는 그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한쪽 벽장 혹은 방 안을 가득 채운 컬렉션 제품들은 종종 봤지만 종이 위에 그린 컬렉션은 처음이었던 것.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의 특성을 십분 살려 그녀는 자신이 모은 수많은 작품을 일러스트로 재탄생시켰다. 책을 쓱 훑어보니 기자가 갖고 있는 제품과 겹치는 것도 많았지만 내 것과 달라 보였던 데는 일러스트 터치가 한몫했다. 그녀의 컬렉션은 잡지기자 출신답게 종류가 방대하다. '잡(雜: 섞을 잡. '모으다'라는 뜻도 있다)스럽다'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정확할 듯하다. 통조림 캔, 소스병, 맥주, 마커펜은 물론이거니와 플라스틱 빗을 어떤 형용사로 표현한단 말인가!
2 Winsor & Newton Ink 종이 위에 펜으로 선을 그리고 마커펜으로 색을 채우는 아날로그 방식의 그림을 좋아하는 오연경 작가의 그림 취향과 예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 잘 어우러진 잉크 컬렉션. 3 Leon Book 런던의 레온 레스토랑에서 만든 요리책으로 베이킹과 푸딩을 일상용과 축제용으로 나눠서 소개한다. 빈티지한 표지에서 느껴지듯이 일반적인 요리책과 달리 감각적이고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다.
서른한 살의 일본행
오연경 작가는 어릴 때부터 또래 친구들을 홀릴 만큼 그림 솜씨가 좋았다. 특히 손글씨는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만큼 독특하고 예뻤다. 잡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선배가 기사에 필요한 손글씨를 부탁해 작업을 했는데 이것이 좋은 반응을 얻어 '오연경 기자의 일러스트 다이어리'라는 기사를 매달 진행하게 됐다.
"그때 선배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전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기사를 진행하다 보니 제 그림의 한계를 느끼게 됐어요. 그저 감각만으로 그리기엔 성에 차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과감하게 실행해보기로 했죠.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예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이 더 컸어요.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일본행 비행기를 타게 됐죠."
반년 동안 일본어를 배우고 입학한 오차노미즈 미술 전문학교에서 일러스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선택한 일러스트 공부는 쉽지 않았다. 특히 이 학교의 선생님들은 직접 가르쳐주는 방식보다 학생 스스로 계속 그리면서 깨우쳐가게 하는 방식을 고수했는데, 이는 유학생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난생처음 하는 목탄 데생과 누드 크로키, 정물 수채화 시간마다 미궁에 빠졌다. 안절부절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면 그제야 선생님은 한마디 건넸다. "알 때까지 그려봐!"라고.
드로잉 재료부터 나만의 것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때 가장 많이 간 곳이 바로 학교 앞의 '레몬가스이' 화방. 같은 아크릴 물감이라도 생김새에 따라 예쁘거나 미웠고, 스케치북 표지는 그림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인상이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모든 걸 겉모습으로 판단했고, 이런 습관은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슈퍼마켓에서도 이어졌다. 하루는 음료 코너, 또 하루는 목욕용품 코너 앞을 서성이며 일본어를 읽다가 마음에 들면 하나씩 샀다. 그게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이라는 책의 시작이었다.
물건을 구입하는 기준은 '첫눈에 반한 것'. 수많은 음료수 중에 가장 '예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세제 용기는 그래픽 아트를, 붓으로 쓴 큼직한 한자는 타이포그래피를, 미끈한 다리를 드러낸 무희 샤워 젤은 일러스트를…, 그렇게 물건으로 디자인을 배우고 도쿄를 알아갔다. 2학기 스케치 수업 때 가방 속 물건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그려 크게 칭찬받은 적이 있다. 이에 힘입어 3년 내내 물건을 그렸으며, 졸업 때는 도쿄에서 산 물건들만 모아서 일러스트 포스터로 만들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쁜 것'을 향한 저장 강박증
그렇게 그림의 대상이 될 물건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순간부터 수집에 욕심이 생겼다. 서른을 넘긴 나이였지만 유학생이었고 주머니가 넉넉할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물건은 사고 싶어 플리마켓을 자주 다녔다.
"백화점이나 거리의 일반 매장에 가면 제가 살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어요. 갖고 싶어도 마음속에 새기고 돌아서기 일쑤였죠. 하지만 플리마켓에 가면 달랐어요. 1백 엔 정도의 물건이 대부분이었으니 1천 엔만 써도 남부럽지 않았죠. 세계적인 부호로 유명한 만수르 부럽지 않게 1천 엔으로 호사를 부렸던 기억이 나요(웃음)."
그녀의 물건 고르는 기준은 언제나, 여전히 '예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때문에 실생활에서는 쓰임새가 없는 물건이 많다. 도쿄 플리마켓, 편의점, 슈퍼마켓, 화방 등을 돌며 모은 제품과 인도, 프랑스 등을 여행하며 모은 브로치, 단추, 레코드, 치약, 핸드크림 등 '다이소'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수집품들. 「잡동사니 역습」에서 저자들은 이러한 행동의 원인을 '유전'으로 결론 내리는데, 그녀의 이런 행동·소비 패턴과 안목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라는 고백도 덧붙인다.
이런 유전자 덕에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됐고, 화장품 브랜드 '바닐라코', '이니스프리', '크리니크'와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이른바 잘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가 한국에 들어온 2009~2010년쯤부터 화장품 브랜드에서 일러스트를 가미한 용기를 제작하는 유행이 시작됐고, 물건을 그리던 그녀의 일러스트는 뷰티 브랜드와의 협업에서 날개를 달게 됐다. 특히 바닐라코와의 협업 제품은 출시될 때마다 완판 행진을 기록해 지금까지 꾸준히 함께 작업하고 있다.
1·2 Tiger Balm 어릴 적 살짝 긁혔거나 벌레에게 물렸거나 열이 나려고 할 때 외할머니가 발라주던 멘소래담, 호랑이 연고(싱가포르 제품)는 그녀의 페이버릿 아이템. 일본을 오가는 보따리상에게 이것저것 샀던 외할머니는 호랑이 연고는 꼭 구입했다고. 역시 유전이다.
일러스트레이터의 책을 향해
「일러스트레이터의 물건」은 '이런 걸 누가 그림으로 그리냐?', '누가 그린 거야? 이 사람 진짜 재밌네!'라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에 기획, 출간하게 됐다. 물건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많으니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건'은 그릴 만큼 그렸으니(물론 앞으로도 쭉 그릴 테지만) 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기자 시절에 모았던 책이 3천 권쯤 되고, 도쿄에서 유학하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지금까지 모은 책이 2천 권쯤 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기자 시절에 모은 책엔 글이 일러스트레이터가 돼 모은 책엔 그림이 많다는 점이다. 직업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 5천여 권의 책 또한 일러스트로 그려 또 다른 나의 책을 내고 싶다는 그녀. 예쁜 책이 그녀의 강렬한 컬러감과 확실한 컬러 대비가 느껴지는 드로잉과 만나 재탄생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3·4 Face Soap 패키지가 예뻐서 구입했지만 세정력은 별로였던 겟 리얼 비누. 8만원 상당의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벨루티나 비누는 비싼 값을 톡톡히 했던 고보습 제품이라 가장 아껴 썼다는 게 오 작가의 설명이다.
5 Thai Spice 요리를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지만 패키지에 이끌려 모으게 된 태국소스 컬렉션. 태국 음식에 빠지지 않는 헬시보이 검은 간장소스, 매크루아 굴소스 등은 온라인 숍 아시아마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 6·7 Souvenir 일러스트레이터로 직업을 바꾼 뒤 부모님은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그녀에게 색상이 강하거나 모양이 특이한 기념품을 선물해주시곤 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브라질 예수상은 아빠가, 고무로 만든 자유의 여신상은 엄마가 선물해주신 것. 부모님은 처음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겠다고 유학을 떠날 때 말리지도 그렇다고 크게 응원하지도 않으셨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아버지의 소파 근처에서 우연히 메모 수첩을 보게 됐다. 아버지는 수첩과 국어대사전을 늘 지니고 있었는데, 그녀가 유학을 간 2006년 수첩 첫 장에는 '일러스트레이션'과 '일러스트레이터' 두 단어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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