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림 해석 크륄러 뮐러 뮤지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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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노트 & 빈티지 영화 오프닝 스케치 & 사랑스러운 GIF 색연필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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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범상치 않았다. 크륄러 뮐러 박물관Kröller-Müller Museum을 안고 있는 호게 벨리붸 Veluwe 공원 숲의 나무 잎 색깔이 말이다. 참 대단하다라고 밖에 표현이 안 되었다. 아직은 신록이라고 불러도 될듯한 새잎 사이로 비치는 금년에 처음 대하는 햇빛은 찬란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로 반짝인다. 그런 공원 안에 들어서 있는 크륄러 뮐러 박물관은 정말 입구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고대하던 크륄러 뮐러 박물관

아주 오래 전에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을 가 본 이후 크륄러 뮐러 박물관은 이상하게 기회가 닿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그 곳에만 있는 ‘별 밤 카페 테라스’는 그림보다 실제 아를에 가서 카페를 먼저 보았을 정도이다. 특히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의 ‘감자 먹는 가족들’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위해 고흐가 그린 동명의 스케치를 특히 보고 싶었었다. 고흐 박물관이 고흐의 유화 200여 점, 스케치 500여점 그리고 편지 800여점을 가지고 있어 세계 최고의 고흐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크륄러 뮐러 박물관은 고흐의 유화 91점과 180여점의 스케치를 가지고 있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고흐 신도들에게는 여기가 바로 순례의 두 번째 성지이다. 그런데 전략인지는 몰라도 박물관은 소장품 중 한 번에 오로지 40점만을 골라 돌아 가면서 전시하고 있다. 어떤 그림을 볼 수 있을지 사전 조사를 꼼꼼히 하지 않고서는 운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가장 인기가 있는 작품들은 바뀌지 않고 전시가 된다고 하니 다행이긴 하다. 바뀌지 않는 그림에는 가장 인기가 있는 ‘별 밤 카페 테라스’ ‘우체부 조셉 롤렝’과 부인 ‘아구스틴’과 내가 보길 그리 원했던 ‘감자 먹는 가족들’을 비롯해 ‘지누 부인’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프로방스의 밤길’ 등이 포함된다.

반 고흐의 천재성을 먼저 알아보다

물론 크륄러 뮐러 박물관이 고흐 작품 소장품만으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연간 25만명의 관객이 오지만 결코 소장품은 고흐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피에트 몬드리안, 조지 브라크, 폴 고갱, 파블로 피카소 같은 거장들의 걸작도 있다. 박물관이 설립될 수 있게 자신이 평생을 걸쳐 모은 작품을 모두 국가에 기증한 헬레나 크리러 밀러는 제일 먼저 반 고흐의 천재성을 알아채고 1908년과 192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를 러시아의 캐서린 여제 이후 예술품을 수집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시작한 거의 첫 여인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죽기 4년 전인 1935년 네덜란드에 헌납하고 그 3년 뒤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공원 안에 그녀의 이름을 따서 박물관이 설립된다.

그리고는 현재 관람객의 발길을 공원으로부터 떼 놓지 못하게 하는 조각공원은 1961년 더해 졌다. 우선 ‘감자 먹는 가족’부터 보자. 크륄러 뮐러 박물관에 있는 스케치는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에 있는 고흐의 ‘감자 먹는 가족’의 사전준비 작업으로 그려 본 스케치이다. 고흐박물관의 작품은 고흐가 처음으로 시도한 대형작품이다. 82114 크기의 작품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골 농부 가족들이 등불 하나 밑에 모여 앉아 농사일로 거칠어 진 손으로 한 접시의 감자를 나누어 먹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화가들은 보통 우리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필휘지의 솜씨로 한번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대가들도 유화를 그리기 전 주문자에게 승인을 받으려는 목적이나 구도를 잡을 목적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전준비를 해 본다. 우선 각 부문을 나누어 초기 단계 스케치를 그린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전체 그림의 윤곽이 잡히면 이를 조합해 전체 스케치를 그려본다. 그리고는 거기에 제대로 된 채색을 해서 만족하면 다시 유화로 주요 부분을 그려본다. 이렇게 전체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그린 완성된 부분도는 그 자체 단독으로도 예술적인 가치를 가진다. 실제로 대가들의 그림 중에는 전체 그림의 부분도가 더 유명한 경우도 흔하다. ‘감자 먹는 가족’들의 경우도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에 있는 유화가 본격품이라면 크릴러 밀러 박물관에 있는 오일 스케치가 두 번째 단계의 그림이고 당시 유행하던 방식으로 만들어진 석판화lithograph는 뉴욕 현대 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곳에 있다.

고흐의 철학인 담긴 ‘감자 먹는 가족’

‘감자 먹는 가족(1885년 F78)’의 아이디어는 고흐가 아주 좋아하던 철학이 들어 있는 작품이다. 당시 고흐는 농부, 광부, 어부, 직조공 같은 노동계층의 사람들에게 요즘 말로 꽂혀 있었다. 고흐는 사회비판 시각의 작가 찰스 디킨스, 조지 엘리어트의 책을 많이 읽어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시골농부들의 삶을 그려 유명해진 밀레의 거의 숭배하다시피 해서 자칭 그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첫 본격적인 작품으로 이 작품에 정성을 들였다.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의 작품 ‘오두막집’에 살고 있던 두 가족 중 그루츠 가족이 주인공들이다. ’오두막집’은 석양의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오두막집이라서 음울한 분위기가 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감자 먹는 가족’은 가족들이 사는 오두막집에 등장하는 어둡고 음울한 바깥 날씨와는 달리 따뜻한 정감이 드는 작품이다. 감자 먹는 가족들 위에 비치는 작은 등불이 묘하게 가족들을 연결해 주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고흐는 이 작품에 아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자랑스러워 했다.
그러나 동생 테오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 반 라파드로부터 혹평을 받는다. ‘너는 다행스럽게도 이것보다는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너의 작품은 진지하지 않다. 너무 피상적으로 그림 대상을 관찰했고 쉽게 다루었다. 그런데도 너는 밀레와 브레톤의 이름을 이런 졸작에 연계해서 감히 왜 들먹이는지 모르겠다, 예술은 그렇게 가볍게 취급하기에는 너무 숭고하다’라는 미술사에 길이 남는 혹평을 한다. 사실 이들의 혹평이 부당한 것은 아니다. 5년의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뒤 나온 작품이라고는 하나 기본을 마스터하기 전의 작품이라 인물이나 손의 묘사 등이 거의 만화 수준이라는 혹평까지도 있다. 기술보다 마음이 앞섰다고나 할까?
고흐는 ‘감자 먹는 가족’의 구상을 오래 동안 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 연습 스케치가 존재한다. 2-3명 심지어는 5-6명이 등장하는 스케치도 있다. 구도가 좌우로 바뀐 석판화도 그린다. 처음으로 전체를 그려 본 것이 현재 크륄러 뮐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통해 고흐는 화단에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했지만 최고의 구필 화랑의 초보에 불과했던 동생에게서 조차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고흐는 안달을 한다. 결국 혼자서 제대로 되지 않은 석판화를 화상에게 보내도 보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이 점이 연구가들이 의문시하는 점이다.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려고 하면서 왜 이런 어설픈 스케치를 먼저 보냈는지 말이다. 동생 테오는 미숙하지만 장래성이 있다고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편지에 썼다. 그러나 많은 고흐 연구가들은 ‘감자 먹는 가족’을 고흐의 진정한 예술작품으로는 첫 작품이라고 여긴다.

밀레와 정서적인 공감을 원했던 고흐

비록 기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고흐의 철학이 잘 담겨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고흐는 이 작품을 아주 좋아했고 자랑스러워해서 테오에게 자랑을 했다. ‘너 있잖니! 나는 정말로 이들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조그만 등불 아래서 감자를 먹는 이 농부 가족들을 알려주고 싶다. 접시에 담긴 감자를 집어 먹는 바로 저 손으로 그들은 직접 땅을 파서 자신들의 식량을 정직하게 만들어 냈다. 문명인인 우리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의 저들의 삶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이 그림을 단순히 감탄하거나 인정하는 것을 정말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고흐는 이렇게 밀레가 전달하고자 했던 ‘진정한 농부들의 그림’을 자신도 이루어 보고자 갈망했다.‘
그들을 통상적인 매력을 통해 전달하기 보다는 비천하게 그려내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더 낫다고 나 자신은 믿는다’라고 하면서 농부들을 ‘동물처럼 역겹고 짐승 같고 상스럽고 추악하게’그리려고 했다. ‘감자먹는 가족’들 속에 등장하는 농부여인들을 아프리카 흑인 여인처럼 그렸다. 두터운 입술, 돌출한 광대뼈, 낮고 납작한 이마가 바로 그것이다. 왼쪽의 편편한 이마와 튀어나온 귀는 괴기스러운 희화한 모습이다. 왼쪽 두 인물의 크게 벌린 눈은 동물의 눈을 묘사한다. 이런 모습은 농부들을 특별하게 헐뜯기 위함이 아니다. 이런 모습이 진정한 그대로의 농부들의 모습이라고 고흐는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큰 손과 큰 눈은 동물적인 감각을 느끼게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의견도 있다. 식탁 위의 감자가 흡사 미사의 성체처럼 보인다 하여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비교하는 사람들 마저 있다. 둘러 앉아 감자를 먹는 모습에서 둘러 앉아 미사를 드리는 예수의 제자들 모습이 보인다는 말이다. 어찌 되었건 걸작을 만들어 세상을 놀래 키면서 출세를 하고자 하는 야심과 열성을 가지고 그린 첫 작품인데 결국 고희의 의도와는 달리 별 도움이 안 되었다.

고흐의 첫 풍경화 ‘밤의 커피 하우스’

크륄러 뮐러 박물관으로 사람들이 몰리게 하는 고흐의 작품은 뭐니 뭐니 해도 바로 ‘밤의 카페 테라스’이다 이 작품은 비록 서명은 안 되어 있지만 고흐의 편지 3개에서 언급되고 있다. 보통 고흐는 자신이 잘 그렸다고 여기는 작품에만 ‘빈센트’라는 자신의 이름 서명을 했는데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서명이 없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전에 준비로 그린 같은 구도의 스케치도 있다. 아를에 가면 고흐가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렸던 장소에 표지가 서있고 아직도 그 장면이 연상되게 카페를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카페는 1990/1991년에 그림과 똑같이 보여지도록 수리되었다. 고흐는 남쪽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끝낸 뒤 여동생에게 편지에서 언급한다. ‘밤 하늘을 검게 표현하지 않고 푸르고 보라색과 녹색의 조화로 그렸다. 그리고는 주위는 옅은 노란색과 담황색으로 칠했다’고 했다. 처음에 전시되었을 때의 제목은 ‘밤의 커피 하우스’ 였다. 별이 밤하늘에 가득 찬 첫 그림이었다. 곧 이어서 같은 달에 ‘론강의 별 밤’이라는 별이 하늘에 가득찬 밤하늘을 그렸다. 고흐는 풍경화로 유명해졌다.
그런데 사실은 고흐는 초상화를 그리기를 더 좋아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모델과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는 일을 무엇보다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델에게 돈을 지불할 능력이 별로 없던 고흐는 아를과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주위 이웃을 많이 그렸다. 특히 아를의 룰랭 가족들은 아주 협조적이어서 많이 그렸다. 고흐는 이들을 정말 프랑스인답게 친절했다고 평하면서 모습은 흡사 러시아인 같이 생겼다고도 평했다. 특히 우체부였던 텁석부리 아버지 요셉을 러시아의 대문호 피요트르 토스토예프스키를 연상시킨다고도 했다. 수도 없이 교환하는 테오의 편지를 전달하는 중간 역활을 조셉이 해서 가깝기도 했지만 고흐는 자신의 이웃이자 술친구이고 그림 모델인 조셉을 아주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생각이 깊고 현명해서 언제까지나 대화를 나누어도 지치지를 않는다고 호평을 했다. 고흐는 조셉 6점, 아구스틴 부인 정면화 2점과 함께 ‘요람을 흔들고 있는 부인’의 이름으로 화려한 꽃무늬 벽지를 배경으로 해서 5점, 모자를 쓴 반항적인 표정의 17살의 아들 아르만드 3점, 베레모를 쓴 장난꾸러기 표정의 11살의 까미유 3점 그리고는 태어난 지 겨우 4개월의 마르셀르 3점과 나중에 고흐의 성모자상이라고 해석되기도 하는 어머니 아구스틴과 같이 그린 2점해서 물랭 가족을 고흐는 모두 23점을 그렸다. 이 중에서 요셉과 아구스틴의 그림이 각각 한 점씩 있다.

사후 고흐의 조력자, 요한나 반 고흐 봉어

이제 고흐가 어떻게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려고 한다. 앞에서 잠깐 말한 크륄러 뮐러 박물관의 헬레나 크릴러 밀러의 역할도 있긴 했지만 결국 고흐를 세상으로 알린 사람은 고흐의 동생 테오의 부인 요한나 반 고흐-봉어이다. 그녀는 남편이 월급을 받으면 거의 반을 형에게 보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의 이름을 빈센트라고 지을 정도로 고흐를 자랑스러워 했다. 고흐가 죽고 6개월 뒤 바로 테오가 죽자 요한나는 그 때부터 자신의 운명처럼 고흐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온 몸을 바친다. 물론 그녀로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을 수 도 있다. 테오는 유산도 별로 없이 고흐의 그림만 남기고 죽었다. 이제 겨우 한 살의 아들을 데리고 요한나가 살아 남으려면 자신의 집을 차지하고만 있는 그림을 팔아야 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는 네덜란드 소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역을 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하다가 말은 고흐의 전시회와 편지집 출간을 자신의 소명처럼 계속했다. 고흐의 작품을 누가 얼마를 준다고 해도 절대 한 점 한 점 나누어 팔지 말라는 테오의 유언을 지키려고 최대의 노력을 했다.
결국 이를 지켜냈고 덕분에 지금 세상은 고흐의 대다수의 작품을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과 이 곳 크륄러 뮐러 박물관을 오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를 두고 한 고흐 전기 작가는 ‘아주 드물고, 아주 소중하고, 아주 중요하다’라고 했다. 그녀의 작업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흐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자신만의 첫 전시회는 테오가 갖은 노력을 다 했지만 테오 자신의 아파트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요한나는 1892년 2월 고흐 사후 2년만에 제대로 된 전시회를 열었다. 물론 자비로 대관을 했고 두 달 동안 2000명만이 다녀 가는 별로 큰 성공을 못 거두었다. 이런 요한나를 두고 한 네덜란드의 화가가 ‘요한나는 작고 매력적인 여인인지는 모르나 나를 아주 짜증나게 한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단순히 센치맨탈한 이유로 너무나 맹목적으로 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그것은 여학생의 행동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녀는 슬픔 때문에 빈센트를 거의 신으로 만들고 있다.’라고 했다.

1962년 고흐, 세상에 알려지다

고흐의 작품이 고흐 생전에 전혀 대중들에게 보여질 기회가 없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몇 번의 기회가 있었다. 단지 고흐의 첫 전시회 결과와 마찬가지로 고흐의 화풍은 당시 풍조와 맞지 않아 인기를 못 끌었을 뿐이다. 죽기 2년 전인 1888년 독립예술가 협회에 고흐가 가입하고 그 해 연례전시회에 세 점을 출품했고 그 이듬해는 두 점을 출품해서 선을 보일 기회가 있었다. 1890년과 1891년 전시회에도 도합 10점의 작품이 전시된바 있다. 이 전시회를 통해 당시 이미 명성이 올라가고 있던 클라우드 모네와 점묘화의 대가 폴 시녀크가 이미 고흐를 눈 여겨 보기 시작하는 성과가 있긴 했지만 대중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모네나 친구 고갱은 당시 제법 알려진 화가였다. 그런데 그들이 고흐를 천재라고 평했는데도 고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테오는 자신의 형의 천재성을 이미 알고 있었고 언젠가 세상이 그의 가치를 알아주리라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언으로 절대 작품을 부분적으로는 팔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그는 고갱과 피사로의 작품을 팔아주던 당시 꽤나 유명한 아트 딜러였으니 시대를 앞서 작품을 보는 혜안이 있었다. 그래서 만일 테오가 오래 살아 있었다면 고흐의 작품이 이렇게 완벽하게 남아 있을 수 있어서 지금처럼 공공박물관에서 세인들에게 보여 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조금 더 일찍 세상에 알려지긴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흩어져 가 버려 개인소유물이 되어 버렸을 확률이 더 많다. 요한나의 노력으로 천천히 고흐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때 암스테르담 시립도서관이 재빠르게 알아채고 대여 전시를 요청해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가 허락해서 전시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고흐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드디어 1962년부터 고흐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고흐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자 그는 회화 200점, 스케치 400점, 편지 700장 전체를 국가에 기증했다.
 
사실 고흐의 명성은 그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1872년부터 시작된 형제 사이의 편지는 결국 요한나의 노력으로 1914년 편지집을 3권으로 발간한다. 바로 이 편지집을 통해 비운의 천재화가의 생애가 알려지고 그림마저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네덜란드 그리고는 독일 그리고는 결국 유럽으로 명성이 번져간다. 이렇게 비운의 천재는 결국 그림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려야만 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노트

이게 몰스킨에 쓴 반 고흐의 노트인지는 모르겠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도 보인다. 글씨를 보면 우리가 선입견처럼 알고 있는 다혈질적인 성격의 반 고흐는 온데간데 없고, 아주 섬세하며 차분한 반 고흐만이 보일 뿐이다. 물론 두 가지 성향 모두 지니고 있었겠지만 최소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거나 습작 노트를 적을 때 만큼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심정으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썼던 것은 아닐런지.

고흐 배경화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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