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
[journal/movie] - 너의 이름은(きみのなは) - 작화 1탄
[journal/movie] - 너의 이름은(きみのなは) - 작화 2탄
[journal/movie] - 너의 이름은(きみのなは) - 작화 3탄
#Intro
말로만 듣던 키미노나와 영접. 탈도 많고 말도 많고 대체 뭔 영화인가 궁금했다. 일본에서 2016년 8월에 개봉해서 약 반년을 극장에 걸려있었고, 우리나라엔 2017년 1월에 들어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이름만 알고, <초속 5cm> 줄거리만 대충 알아서, 사실 기대는 크게 없었다. 2016년 당시 일본 날아가서 보고 오는 사람들 후기며, 벌써 순이익 2억을 돌파했다더라 하는 이야기들에 호기심이 동해서 얼른 보고 싶었을 뿐!
방금 검색해봤더니 (2017년 6월) 최종수익 $354,425,227 우리나라 돈으로 약 4,035억 원. 워- 미쳤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2위로 밀어냈다. 이거 진짜 장난아녔구나.
#"기억은 잊혀져도 느낌은 남아있다"
어떤 일이 벌어졌어, 근데 현재의 나는 그게 무슨 일인지 몰라. 근데 어떤 중요한 일이었다는 건 확실하고, 잊으면 안되는데 자꾸 잊혀져가고. 잊혀져가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어떤 그리움과 무언가를 계속 찾아다니는 무의식 속의 깊은 끌림이 현재에 유지되는 것. 사람이 어떤 말도 안되는 것에 끌리고 무언가 계속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중요하다는 것만 알아. 근데도 계속 그걸 찾아야만 할 것같은 그런 강박감. 인연으로 말하면 운명이자 짝일수도 있고, 직업으로 말하면 타고난 천직이자 달란트일 수도 있다.
다소 어설프고 오글거리는 영화가 내게 깊게 다가온 것은 인간의 영역 밖의 어떤 운명론적인 부분에 대해서 꽤 그럴싸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뭔지도 모를 강한 운명론적 끌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갈망하면서 답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주인공들이 맘에 들었다.
+
그리고 미친 작화. 우리 작화 실력 요정도야,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도대체 몇 명의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건가. 아름답고 화려한 영상 속에서 작정하고 만든 피땀이 느껴졌다. 작화 때문에 한 2-3백 장은 캡쳐해둔 것 같다.
++
물론 디테일한 전개나 결국 왜 이런 일들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어서 아쉽고 구멍을 찾기 시작하면 한두개가 아니긴 하다. 그럼에도 운명론을 가장 그럴싸하게 자연재해와 남녀 관계로 풀어내는 부분으로 나는 별 네개 반을 줄 수 있다.
도시와 시골,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무스비
왓챠나 다른 리뷰들 보면 이렇게 극과 극으로 평이 엇갈리기도 쉽지 않을텐데. 나 역시 일본 특유의 그 이상한 오글거림을 잘 참질 못하는 편이라 싫다는 입장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극 전개 중에 여러번 뒷통수를 후려맞아서 오 생각보다 묵직한 울림이 있는 스토리구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둘이 막판에 만나게 해주고 끝나서, 괜찮은 영화로 기억에 남았다. 특히 할머니가 무스비 설명해주고 그 뒤로 갑자기 전개되는 반전들이 흡입력 있었다. 무스비에 대해서는 오오 재밌는 개념을 신기하게 설명하네, 공감을 많이 하면서 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전부 하나님의 힘이란다.
하나님의 솜씨,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나타내는 거지.
모여 형태를 만들며 뒤틀리고 얽히고
때로는 돌아오고, 멈춰서고
몸 속으로 들어간 게 영혼으로
매듭지어지는 것 무스비,
하나님과 인간을 잇기 위한
소중한 관계라는 게야.
#노스텔지어
그리고 이어지는 도쿄 배경의 남주 시점. <향수(Nostalgia)>라는 사진전을 보러 간 게 주인공에게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에 대한 암시이다. 기억도 못하는 어떤 느낌을 쫓아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는 어떤 특정한 시골 동네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희얀한 노스텔지어를 느끼는 남주.
#반전의 서막
혜성이 떨어지고 더 이상 몸은 바뀌지 않는다. 여주를 만나러 무작정 찾아가는 남주. 하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뜨등-
(여기서부터 스포 주의)
#여주(미츠하)와 남주(타키)의 진짜 이야기
연락이 돌연 닿지 않고 몸도 더 이상 바뀌지 않자,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마음에 미츠하를 찾아간 타키가 마주한 풍경은, 3년 전 혜성이 떨어져 살아남은 사람이 없던 한 마을이었다. 둘은 동갑도 아니고 동시간대를 산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1차 반전. 시골의 미츠하는 3년 전의 시간에서 도시의 타키는 현재의 시간에서 서로의 몸이 뒤바뀌어 왔던 것이다. (이 부분 때문에 대차게 까여대고 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날짜를 모를 수가 있냐? 여긴 살짝 억지다) 그래서 3년 전에 미츠하가 타키를 만나러 도시에 갔을 때 타키는 미츠하를 모르던 상태였고, 타키가 미츠하를 만나러 온 현재엔 이미 사고가 발생한 이후라 미츠하는 고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게 2차 반전. (설마 죽었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못해서 뭐어어어어???? 이러고 봄) 그리고 사고 장소에서 황혼의 시간에 잠깐 만나게 되는 미츠하와 타키.
#마지막 반전, 재해 이후의 희망
마을이 혜성충돌로 폐허가 될 것임을 알게 된 미츠하는 우여곡절로 사람들을 무사히 피난시키고, 미래를 바꾼다. 이 혜성충돌이라는 자연재해에 부여하는 의미가 또 하나의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감독은 인터뷰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희망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관점으로 뒷부분을 마저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재난을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타키라는 남주로, 그리고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남주와 3년의 차이를 두고 교차편집되던 미츠하라는 여주로 표상된다. 둘을 이어주는 것은 밤도 낮도 아닌 황혼의 시간, 그리고 무스비. 타키와 미츠하가 잠시 만나고 난 뒤 사고가 났고, 그 이후로 타키는 미츠하에 대한 기억과 이 마을에 대한 기억을 자꾸 잊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걸 재해석하면, 재난이 일어나고 난 뒤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자꾸 재난으로 희생된 사람들과 그 재난 자체를 잊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타키가 미츠하 손바닥에 이름을 안 써주고 "널 좋아해"라고 써서 이것도 돌팔매질 엄청 당하는데, 만약 이름을 썼더라면 사고가 난 뒤 이름 자체가 지워졌을 거라는 해석이 있다. 감독은 결국 무스비를 통해 둘을 만나게 해주는데, 현재를 사는 우리가 과거에 사고로 사라져간 사람들을 잊지 않고 늘 연결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성공한 것 같다. 세월호가 겹쳐서 잔상이 오래 남았다.
타키가 미츠하를 만난 뒤에 중얼댔던 대사를 다시 이 프레임으로 읽어보면 눈물이 핑 돈다.
네가 세계 어디에 있든,
잊어버리면 안 되는 사람.
#Outro
정처없이 헤매는 인간의 운명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건과 흐르는 시간들. 그리고 과거의 일어났어야 하는 일(운명/예정론)을 현재의 인간의 능동적인 힘(자유의지론)으로 개입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과정까지. 일어나야 할 사고는 일어났고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바뀌는 부분이 발생,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것. 양 끝의 이론들을 둘 다 수용하면서도 조회롭게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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