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계(Lust and Cautio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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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감독



결말을 모른채 봤기 때문에 충격적이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였고 보고 나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영화.

시대물 배경과 의상은 오감을 만족시켰고 미장센도 아름다웠다.

이선생이 마조히스트라는 게 밝혀졌을 때 ‘어우 뭐야 알고보니 또라인가’ 했는데

나중에 문득, 아 민족을 배반한 앞잡이이자, 

본인 스스로도 철저히 감시당하던 꼭두각시 역할을 해내야 했기에

매순간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던 한 사람의 비틀린 감정의 표출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만큼 강렬하고 그만큼 파괴적이고 지독했겠구나.

이안 감독은 왜 그닥 아름답지도 않은 정사씬을 저렇게 긴 시간을 할애해서 넣었는가에 대해서 역시

(여전히 100% 동의하거나 이해할 순 없지만 내가 느낀 선에서 어느정도 해석해보자면)

이선생과 마찬가지로 맥부인을 연기하던 왕치아즈의 복잡한 심정,

즉, 본인이 연기하고자 하는 것과 실체가 자꾸 혼선을 빚고 

그로 인한 혼란과 스스로의 감정에 어디서 어디까지 선을 긋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연기를 해야하는지까지 모호해지는 순간을 표현하고자 한 게 아니었나 싶다.

경계가 흐려진 그 순간은 그토록 치명적이고 절망적이어서 마치 한 마리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색과 계 사이를 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던 두 사람은 연극무대와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이 부분에서 나는 감독이 우리에게 불편하고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고 생각한다. 





처음은 이선생에 대하여.

민족을 팔아넘긴 쳐죽일 친일앞잡이도 극도의 공포에 짓눌려 

위로받고 싶고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한 인간의 처절함에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마땅한지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는 불가능한가?

무언가를 속여 팔고 이용한 뒤엔 그보다 더 지독하게 팔리고 이용당하는 원리는 정의인가, 숙명인가?

본인이 선택한 숙명에 뒤따르는 고통에 어디까지 공감해야 하는가?




그 다음엔 맥부인을 연기한 왕치아즈에 대하여.

색과 계 사이를 가르지 못해 결국 파국을 맞이하는 한 인간의 행로가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약한가?

왕치아즈가 두 세계를 깊이 오갈수록 드러나는 (우리의 예상과 다른) 진실들을 마주할 때, 

처음에 추구하던 가치관과 신념을 끝까지 가져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드러난 진실 조각들을 (일부일지라도) 짜맞춰 새로운 가치관과 신념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 옳은가?

비록 뚜렷한 신념이나 자기 확신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인간이 마주하게 되는 진실 앞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의나 받쳐주는 사상의 체계 없이 자신이 조금이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쪽,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마음이 가는 쪽으로 선택하는 지극히 독단적이고 주체적인 결정에 대한 가치판단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민족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뭉친 항일단체에 대하여.

정의란 무엇인가? 인류보편적인 절대 정의라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 정의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과 방식은 조금 비열하고 조금 더럽고 조금 역겨워도 괜찮은가?

인간의 가치판단으로 내리는 ‘정의'의 한계인가, 아니면 절대선을 이루기는 불가능한 ‘인간 본질'의 한계인가?

인간이, 무엇이 옳다고 믿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심지어는 그것이 불의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동의하는가?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의 과정이나 결과가 점점 나빠지는 경우가 흔한데, 이것 역시 인간의 나약함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선을 제대로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체 어떤 기준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과연 인간에게는 선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긴 한 것인가?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지만, 악을 제거하기 위한 순수한 열정으로 모인 집단의 정의구현 실체가 

구성원들의 나약함과 비겁함, 나중에는 무엇이 우선이었는지 사리분별조차 마비되는 인간의 한계에 부딪쳐
결국 그렇게 도륙하고 싶던 적의 비열함과 불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지독해져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과정이

기존에 당연하게 갖고 있던 선악 간의 대립구도와 가치체계를 흔들고 나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하고 중국 내에서 그토록 욕을 쳐먹은 이유 역시 이 불편함에 대한 반응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나도 배경이 중국이기에 반감이 덜했을 뿐, 만약 한국을 배경으로 친일파에 대해 이런 주제의 영화가 나왔다면, 음
이렇게 한 발 뒤에 서서 생각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욕을 중얼대며 돌을 던지고 씩씩거리며 뒤돌아 나왔지 않았을까?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누가 이것에 대해 100% 확신을 가지고 가를 수 있을까.


집단과 개인의 대비 역시 뚜렷하게 도드라져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통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이 존재하더라도

그 집단 안에서의 개개인의 행동은 모두 ‘절대선’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왜? 인간이니까.

강점기 치하 나라를 배신하는 매국행위 역시 보통 생각하는 ‘악’의 범주이지만,

그 안에서의 개인으로 존재하는 ‘매국노’ 역시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나약한 동물, 

공포와 두려움으로 선택한 ‘악’일 뿐,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이 부분이 민감한 게 매국노를 절대로 지지하거나 두둔하거나 연민을 느끼는 게 아닌데 

자칫 그렇게 읽힐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 길어진다. 아님다 절대 그런거 아님다.)

이안 감독이 똑똑하면서도 못된 게 이런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특히나 왜 하필이면 민족적 자긍심 세계최고 중국을 배경으로 이런걸 만들어가지고)

악은 무조건 쳐죽일 것이고 선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단순한 체제를 자꾸 뒤흔들기 때문인데,

(아 너무 어렵다) 어느정도 선을 긋고 마무리하자면

인간에게 절대로 선하거나 절대로 악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인간은 악하거나 선할 수는 있지만 100%로 악하고 100%로 선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악한 선택을 하고 선한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절대적’이란 말은 인간에게 허락된 가용범위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단지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많은 사실들 가운데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서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선택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가끔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자체가 잘못되어서 선한 의도를 가졌지만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살면서 점점 더 무거워지는 판단의 무게를 조금 덜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이 영화가 끝나고, 무저갱의 앞에서 꿇어 앉은 왕치아즈의 홀로 그토록 처연하던 표정

-한 때 동료였고, 나를 이 연극에 초대한 이들을 결국 이 앞까지 같이 몰아넣고 쓱 둘러보던 그 표정,

한 때 좋아했고, 이 연극의 시발점인 남자의 원망어린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던 그 얼굴- 

그 표정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뭔 생각을 했을까ㅠㅠ 내 인생 좆되게 만든 새끼들과 지옥 문 앞에서 하이헬로)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이선생의 표정.

어두운 방 왕치아즈가 앉아 짐을 정리하던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눈과 그 처연하고 공허한 표정이

왕치아즈의 마지막 그것과 너무나 흡사해서 놀랐고, 마지막 방의 어두움은 이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캄캄해서 먹먹했다.

그 방의 공기는 너무 무거웠고 너무 짙고 어두워서 숨이 막혔고 그 역시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아 정말, 괜찮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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