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직장인 스터디 소모임 시대, 동서양 고전 통째로 암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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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모임 르네상스'다. 일반인들이 모여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공부하고 직장인들은 경쟁력 있는 보고서를 쓰겠다며 '글쓰기 교실'에 몰려들고 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들과 임원들이 대학 개설 '인문학 최고 과정'을 찾는 건 이젠 흔한 일이 됐다.

숱한 공부 모임 중에서 지난 3월 출범한 '건명원(建明苑)'은 유난히 튄다. 가장 핵심적인 학습 방법으로 암기를 강조한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전문을 암기하고 키케로·플루타르코스 같은 작가의 라틴어 원전(原典)을 통째로 외우는 식이다. 일종의 현대판 '스파르타식 서당(書堂)'인 셈이다. 일정 수준 이상으로 학업을 따라오지 못하면 가차없이 탈락시키고 개인 사정은 안 봐줄 정도로 학사 관리도 혹독하다. 매주 출석과 시험·과제 점수를 종합해 부적격 수강생을 걸러낸다. 벌써 4명이 탈락했다. 과정이 끝나는 오는 12월에 몇 명이 살아남을지 아무도 모른다. 고리타분한 인상을 주는 동서양 고전, 이미 오래전부터 퇴물 취급을 받았던 암기식 교육 방법…. 그런데도 여기서 교육을 받겠다는 지원자가 1000여명이나 몰렸다. 이 중 3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19~29세 대학생·직장인·주부·군인 30명이 뽑혔다. 학점과 스펙, 취업만이 유일한 선(善)이자 가치로 취급받는 우리 사회에서 고전이라는 콘텐츠와 암기식 교육은 과연 어떤 매력과 위력이 있는 것일까.






지난 26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건명원에서 최진석 원장(서강대 철학과 교수·맨 왼쪽)이 수강생들에게 암기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 교수는 “반복과 암기를 통해 텍스트에 숨겨진 의미의 핵심으로 돌파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 이진한 기자

암기, 신세계를 여는 열쇠

지난 26일 오후 9시쯤.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옥마을의 한 모퉁이를 돌자 불을 환하게 밝힌 한옥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75㎡(약 22.6평) 크기 안채에는 수강생 20여명이 앞뒤로 놓인 긴 책상 8개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암기하고 있었다. 수강생들은 "잠시 후 치러지는 도덕경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윽고 건명원 원장 최진석(서강대 철학) 교수가 시험지 뭉치를 들고 들어왔다. 시험지는 A4용지 4장 분량. 도덕경 1~8장에서 무작위로 발췌한 단락의 빈칸을 채우는 문제가 출제됐다.

서울대에 재학 중인 송승근(25)씨는 "한문 암기 시험을 4주째 보는데 볼 때마다 어렵고 외울 때마다 힘들다"며 "이번에도 완벽하게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몇 자 틀렸다. 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건명원이 암기식 학습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암기야말로 사람을 진정한 배움의 경지로 이끄는 소중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도덕경과 동양철학을 강의하는 최진석 교수는 암기를 "의미의 무늬(文)를 뇌에 새기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시 100편을 그냥 읽고 잊어버리는 것보다 10편을 완전히 외우는 게 훨씬 가치 있다"며 "읽기·말하기·쓰기를 반복하면서 완전히 육화(肉化)된 텍스트는 핵무기와 같은 위력으로 인생을 바꾼다"고 말했다.

서양 고전과 종교학 강의를 맡은 배철현(서울대 종교학) 교수는 "나는 라틴어라는 망치로 학생들의 머리를 때리는 사람"이라며 "고대 언어를 암기해 그 언어를 사용하던 고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면 사유의 지평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창의성은 훈련할 수 있다"

"구체적인 예술 작품 속에서 진리 또는 비(非)진리의 출현을 기술(記述)해볼 수 있는가?"

이날 1교시에 '예술, 삶 안에 들어있는 거대한 번데기'라는 주제로 강의한 서동욱(서강대 철학) 교수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수강생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 교수는 "흔히 창의성을 선천적 재능으로 여기지만 창의성은 후천적으로 훈련할 수 있고, 또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믿는다"고 했다.

건명원 교수진은 훈련 원칙으로 ①익숙하지 않은 질문 던지기 ②이질적인 요소들을 충돌시키기 ③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어렵거나 많은 양의 정보를 처리하기 등을 제시했다. 동양철학-뇌과학, 물리학-서양사학, 종교학-건축학 등 완전히 이질적인 학문을 짝지어 구성된 수업 시간표, 방대한 양의 고전 암기 역시 이러한 훈련 원칙에 따른 것이다.

처음 수강생들은 '너무 어렵다' '양이 비인간적으로 많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나자 이렇게 혹독한 '창의성 훈련'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대학원생 최지범(25)씨는 "키케로의 라틴어 텍스트를 소리 내 읽으면서 정말 로마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며 "번역본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감각"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박승헌(23)씨는 "고전을 암기하고 평소 익숙하지 않았던 지식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누구인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대판 ‘스파르타식 서당’으로 불리는 건명원 모습. 건명원은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이 가회동 한옥을 포함한 사재 100억원을 출연해 설립했다. / 이진한 기자

의심하고 질문하라

건명원 교수진은 "훈련의 목적은 단지 창의성을 기르는 데만 있지 않다"고 했다. 김개천(국민대 건축학) 교수는 "창의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존의 틀을 완전히 파괴한 뒤 과거에는 없었던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라며 "암기로 지식을 쌓는 까닭 역시 옛 사유 체계의 경계에 도달해 그것을 부수기 위해서다"고 했다.

건명원은 지난겨울 수강생을 모집하며 "'시대의 반역자' '창의 전사(戰士)'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이를 위해 교수진이 강조하는 것은 '의심과 질문'이다.

최진석 교수는 "의심과 질문이야말로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남과 다른 나'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늘 무리 속으로 들어가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하기 때문에 질문을 두려워한다"며 "창의적 인재가 되려면 평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존 상식·도덕·관습 등에 늘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강생들이 '의문의 근육'을 기를 수 있도록 교수들은 기존 상식을 뒤집는 새로운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지난 6월 주경철(서울대 서양사학) 교수는 '콜럼버스, 지상 낙원을 향한 항해'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콜럼버스 위인전 보면 '당시 미신적인 유럽 사람들이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반면 콜럼버스는 이미 '지구는 둥글다'고 했던 과학적인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거 맞아요?"

주경철 교수는 당시 유럽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19세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와 생애'(1828)라는 전기를 쓴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이 콜럼버스의 모험·개척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창작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내려와 '잘못된 상식'이 됐다는 것이다.

직장인 강신우(28)씨는 "지금까지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이야기가 사실과 다르다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의 연못에 매주 돌덩어리가 하나씩 떨어지는 기분"이라며 "처음에는 새로운 사실이 익숙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느꼈던 이론이나 사실에 대해 '정말일까?' '왜 그렇지?' 같은 질문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공동체 운명, 공부에 달려

건명원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조국이 더는 이런 후진적 비극을 겪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두양문화재단 오정택 이사장이 사재 100억원을 출연해 설립했다. 오 이사장은 지난해 9월 건명원 창립 모임에서 "기존의 교육 방식으로는 선진국 진입이 결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가회동 한옥을 배움터로 내놨다. 수업료·운영비와 수료생 전원의 1년 세계 여행 비용 전액을 댄다. 기획자 배철현 교수가 각계 교수 7명을 초빙해 프로그램을 짰다. 수강 과목은 문학·역사학·철학·종교학·미학·언어학·물리학·뇌과학·건축학 등 인문학·과학·예술 분야를 망라한다. 강의는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30분부터 4시간 동안 2교시로 나뉘어 진행된다. 오는 12월까지 한 주도 쉬지 않고 강행군한다.

배철현 교수는 "건명원은 단지 취업에 유리한 '스펙 한 줄'을 위한 곳이 아니다"며 "최종 목표는 공동체의 미래를 혁신하는 인재 양성"이라고 했다.

김개천 교수는 "진정한 공부는 개인의 지적 유희나 성취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과 공동체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앎을 사회가 공유할 때 비로소 선진국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신수안(21)씨는 "건명원에 들어오기 전엔 낯설고 생소한 대상과 마주하면 두려운 마음부터 들었지만 요즘엔 '용기를 내서 돌파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한다"며 "공부라는 것은 지식보다는 마음가짐의 문제인 것 같다"고 했다.

 

 
c.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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