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의 애매한 관계 설정도 내가 썩 좋아하는 과는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이 영화는 그 선을 지켜줘서 기억에 남을 만한 영화로 분류할 수 있게 됐다.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그 어떤 인물도 매력적인 인물은 한 명도 없었으나,
(최근에 본 '그 시절'의 매력적인 주인공들과 아주 대비되는)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적인 음악과 그 음악을 둘러싼 이 꼬인 인간들의 관계가 풀리고
각자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는 과정을 살짝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름 괜찮은 영화라고 본다.
'다양성 영화'로 분류된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이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뒷심이라면 보통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번지기 마련이다. 자못 당신이 지인들에게 <비긴 어게인>을 추천할 때 무슨 말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에는 "음악이 좋은 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영화 OST도 각종 음원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언론 역시 영화 흥행 이유로 아름다운 음악을 꼽는다.
<비긴 어게인> 흥행, 음악만이 이유는 아니다
<비긴 어게인>의 OST는 물론 좋다. 충분히 흥행 이유가 된다.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음악이 좋다"는 단순한 분석이 이 흥행 열풍에 대한 충분한 해석일까? 단순히 노래 때문이라면 극장에 MAROON 5의 뮤직비디오 모음집을 상영해도 흥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영화는 영상 언어이자 영상 문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좋다"라는 평은 반드시 "무엇이 음악을 좋다고 느끼게 만드는가"라는 질문 위에 피어나야만 한다.
영화는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가 <어 스텝 유 캔트 테이크 백(A Step You Can't Take Back)>을 부르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곡은 처음 그레타가 친구인 스티브(제임스 코든) 때문에 억지로 불려나가 부르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이후 댄(마크 러팔로)의 관점에서 반복된다.
그레타가 혼자 부른 전자의 원곡과 댄의 상상력이 더 해져 편곡된 후자 중 어느 노래가 더 마음에 들었는가. 대부분 후자를 선택했을 것이다. 두 번째 곡은 댄의 음악적 재능과 상상력으로 라인이 추가돼 더욱 연주가 풍부해진다. 또한 두 곡에는 관객이 받는 정보의 차이가 발생한다. 처음은 위축된 그레타와 그녀의 노래를 무시하는 청중, 그 후 실성한 남자가 듣는 노래로 끝난다. 하지만 두 번째로 재연되는 노래는 다르다.
댄의 하루를 통해 조각난 가정, 무능력한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아까 그 실성한 남자가 실은 상처받은 남자라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리고 그는 실성한 것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위로받고 있었단 사실을 알게 된다. 자연히 노랫말은 댄이 하루 동안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된다. 이야기가 음악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드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비긴 어게인>은 이야기가 음악을 보조하도록 노래 주제와 시퀀스를 묶어버리는 작업을 반복한다. 음악영화라고 하지만 음악에 집중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레타는 시작부터 앨범을 내기에 충분히 성숙한 실력을 갖췄으며 주연들은 그 어떤 음악적 갈등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세션들을 포함해 도구적 인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오히려 가족영화라면 가족영화고 로맨스라면 로맨스지만 음악영화라기에는 상당히 부족하다.
<비긴 어게인>의 내용은 실연당한 여성의 이별극복과정이다. 음악은 그녀의 상황과 마음을 대변해준다. 바람난 남자친구인 데이브(에덤 리바인)와 그녀를 위로하는 친구 스티브, 그리고 새로운 남자인 댄은 그레타를 둘러싼 등장인물이자 그녀의 남자들이다. 지난 5년 동안 연인이었던 데이브가 성공하자 자신을 버리고 새 여자와 바람나버렸단 설정은 군대 기다려 줬는데 군화 거꾸로 신은 이야기나 고시 기다려줬는데 바람난 고시생의 이야기다.
친구인 스티브도 내 마음을 다 털어놓아도 아무 문제 없을 이성 친구, 즉 게이친구 판타지다. 마지막으로 댄은 사랑에 실패해 연애를 못하는 능력남이다. 칼럼니스트 곽정은의 말을 빌리자면 "허지웅이 인기 있는 이유는 '저 마른 장작 같은 몸에 내가 불을 피워보겠다'는 여성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 같다"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댄의 입장에서도 그레타는 비루한 자신의 인생에 핀 히아신스 같은 존재다. 그레타는 친자식도 아닌 자신의 딸과 놀아주지 않는가.
물론 여기에도 한 가지 장치가 등장한다. 영화는 그레타의 과거는 보여주지만 댄의 과거는 보여주지 않는다. 댄과 미리암(캐서린 키너)의 관계는 원인이 생략된 채 결과만 존재한다. 정확히는 이혼이 아니라 별거 중인 사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이혼한 관계처럼 모호하게 표현된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음악, 이야기의 힘 덕분
▲ 영화 <비긴 어게인>의 한 장면. 앨범제작자 댄(마크 러팔로, 오른쪽)은 작곡가 겸 가수인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왼쪽)를 만나서 '길거리 녹음' 컨셉의 앨범을 만들기로 한다.
ⓒ 판씨네마(주)
이제 음악은 앨범 재킷처럼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를 입는다. <로스트 스타(Lost Stars)>라는 곡을 보자. 데이브에게 이 노래는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는 노래이다. 하지만 그레타에게 이 곡은 추억이며 새 출발의 계기가 된다. 물론 이야기가 일방적으로 음악에 영향을 주는 건 아니다. "음악이 일상적인 것을 특별하게 변하게 한다"는 댄의 고백처럼 음악 역시 이야기에 신기한 마술을 부린다.
왜 우리는 그토록 댄과 그레타가 키스하지 않길 바랐는가. 결국은 삭제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한 키스신. 일반적인 로맨스라면 키스신은 지극히 당연한데 <비긴 어게인>은 키스신이 어쩐지 모든 걸 망쳐버릴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썸'의 모호함을 넘어 두 사람의 관계는 음악을 통해 좀 더 특별한 관계로 포장된다.
두 사람이 데이트하는 시퀀스에서 음악은 뉴욕을 현실의 공간이 아닌 환상의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엄연히 이 장면은 바람을 피우는 행위인데 이를 망각시키고 두 사람을 음악적 교감을 나누는 관계로 포장시킨다. 분명 서로 호감이 있음에도 말이다. 이에 관객들은 "사람은 사람으로 잊어야 한다"라는 관습을 부정한다. 그 과정을 음악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숭고한 행위로 남아있길 바란다. 하지만 키스를 해버리면 이는 어찌됐든 불륜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 환상이 아닌 현실로 추락한다.
많은 사람들이 <비긴 어게인>을 두고 이야기는 부족하나 음악이 좋다고 평한다. 하지만 음악만큼이나 이야기도 살아있는 영화이다. 다만 음악영화로서 충실하지 않을 뿐이고 이야기가 음악에 약간 묻혀있을 뿐이다. 음악과 이야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야기한다. 궁극적으로 음악과 이야기는 상호 보완한다고 피력한다.
영화 OST가 좋다고 느끼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강하게 작용해야 한다. 이 영화는 이야기가 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 또 음악 역시 이야기를 아름답게 수식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도 <겨울왕국(Frozen)>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OST로 성공한 영화에서 음악은 치유를 주제로 삼는다. <비긴 어게인> 역시 그 '힐링코드'가 관객들을 관통해 흥행하는 게 아닐까? 오히려 음악영화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이 '아트버스터'로서 이 영화가 흥행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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