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거의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버금갈만한
신앙의 바이블이라 할 만한 책이었다.
정원 목사님의 영성의 진수가 잘 드러나는 책.
특히나 한국교회의 실질적인 상태를 직접 경험하고 많이 고민한
지은이의 흔적들이 보여서 너무 와닿았던 책이었다.
좀 놀랐던 게, 이미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우리 한국교회나 교회문화, 그 안에도 얼마든지 십자가와 예수가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우리 아빠, 우리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와 너무나 흡사해서 또 깜짝깜짝 놀랐다.
꼭 집에 가져가서 보여드리고 싶었던 책!
이 책은 정말 10점 만점의 10점을 안 줄 수가 없다.
-
주님을 만지는 것
주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과 주님을 만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주님 근처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것과 주님을 실제로 붙잡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생명의 성숙이란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며 착각에서 벗어나 분명한 실제를 발견하고 추구하며 사모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 이야기 이후)
그 장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루 종일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예수님을 진정 접촉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 주님 주위에 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다 주님을 만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 그들은 주일 성수를 합니다. 또한 십일조 생활을 합니다. 또한 십일조 생활을 하고 때에 따라 기도도 열심히 하구요. 이정도면 주님을 접촉한 것 아닙니까?"
-
우리는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자신이 칭찬 받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우린느 주님만이 받으셔야 할 권위와 영광의 일부라도 우리가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너무나 어렵기도 한 말)
-
주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믿음과 행위들은 사람이 타고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악취들을 제거해 주지 못합니다. 비록 외형적으로 경건의 모습을 가지고 보여줄 수는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죄를 죽이는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만와 거짓과 위선과 분노와 음란과 정욕고 욕심과 인색함과 두려움과 경박함을 소멸시키지 못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천국의 향취를 우리에게 주지 못하며 진정한 행복과 기쁨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생명은 이러한 악들을 소멸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아멘!!!!!)
-
(예수님 12살 되던 해, 예루살렘)
어떠한 윤리나 철학과 종교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음, 오직 어린양의 피,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죽음만이 그들을 진정 해방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인물이 오늘 12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부모의 손을 잡고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상상이나 했을까요! 유월절의 예배에서 소년 예수는 전혀 주인공이 아닌 소외된 존재였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서도 그는 잊혀졌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상징성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가 중심인 이 예배와 예식에서 그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
놀고, 떠들고, 웃고, 즐겨도 그것은 주님 안에서 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오직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이것들이 나쁘다 좋다가 아니라, 이 모든 상황들 가운데서의 나의 태도와, 나의 중심의 문제!)
단순히 떠들고 먹고 마시는 데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그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일일까요?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교제는 오직 허탈함과 허무함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뿐입니다.
(ㅠㅠ뼈아프게 깨달은 교훈(
-
듣는 기도
우리는 주님의 임재를 기다리면서 여러 가지 묻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이시간에 당신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제 마음이 지금 답답합니다. 주님이 마치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바로 옆에 계신 것처럼, 친구에게 하듯이 조심스럽게, 친근하게 그분께 질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이러한 기도를 시작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심령 속에서 어떤 내적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신자는 내 생각인지 주님의 생각인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듣는 기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끔 기도하다보면 내 마음이 바뀌고, 내 생각이 바뀌어서 기도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처럼!)
-
감동
사람들을 어떤 감동에 이끄는 것은ㅇ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고 변화시키며 생명의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과 기도와 영적인 권능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없이 도구만을 사용할 때, 쇼는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생명의 변화는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
깨달음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전자는 독단에 빠질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체험은 양식이 아니지만, 주님은 양식이 되십니다. 과거에 아주 비싸고 좋은 음식을 아무리 잘 먹었어도 그 추억으로 계속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양식으로는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
재능은 주를 거스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1 주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허락하신 선물들을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기 쉽습니다. 2 어떤 재능의 성향은 주님의 명령에 의하여 좀처럼 순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생명과 독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탁월한 재능을 많이 가질수록 그들은 겸손하게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3 주님의 생명과 대치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재능 그 자체가 주님께 나아갈 길을 방해하는 무서운 요소가 된다는 것에 있습니다. 재능 때문에, 그 재주의 탁월함 때문에 그 소유자는 주님께 나가기가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졉하지 못한 것처럼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그 훌륭함 때문에 계속 사망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
재능은 주님께 붙잡혀야 합니다
재능은 주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재능에 주님의 생명이 덧붙여질 때, 그것은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도구가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생명은 그 재능이 아니라 그 재능 속에서 흐르고 있는 주님의 능력입니다. 오직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만이 그에게 주어진 지식, 재능, 경험, 은사들을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은사, 비전, 위대한 정신, 자신감, 재능으로 가득 찬 사역자가 주님의 다루심을 많이 받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자신만만하지 못합니다. 그는 주님이 그를 사용하지 않으실까봐, 그를 혼자 내버려둘까 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
내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때 나의 말도 권위가 없는 것입니다. 말이란 그 자체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누구에 의해서 말해졌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
판단
다른 사람의 단점과 교회의 약점이 쉽게 눈에 띄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과연 그를 사랑하는가? 왜냐하면 그러한 비판과 부정적인 시각은 자신감의 결여나 열등의식의 발로, 소외감, 불행한 어린 시절이나 과거 등에서 기인하는 경향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통해서 사랑의 마음을 충분히 얻은 후에야 조금씩 주님이 허락하시는 범위 안에서 분별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 전에는 일체 판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를 재앙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
종에게 주어진 일
종의 임무는 바깥에서 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안에서 주인을 모시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은 바깥의 사역에도 유눙해야 하지만 안에서 주인을 섬기는 데도 역시 익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며 후자는 주님 자신에게 순종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에는 훨씬 더 섬세하고 민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바깥에서는 능력이 필요하지만 안에서는 자기 부인과 겸손이 요구됩니다. 그는 자기의 업무가 끝났다고 해서, 안에서 마구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그는 자신의 입장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직 그는 주인의 필요와 기분에 매우 민감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는 사랑 받는 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사역을 합니까? 그가 밭에 무슨 기업이 있고, 양의 증가에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는 단순히 주인의 분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역이란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 그분께 순종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지 그 사역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never forget!)
-
종의 자유
종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가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는지, 7시에 일어나야 하는지는 주인의 분부에 달린 것입니다. 그가 퇴근을 몇 시에 해야 하는지, 어디로 심부름을 가야 하는지, 오늘은 어떤 내용의 일을 해야 하는지는 주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는 오직 그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수행해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여기지만 삶에 있어서의 중대한 결정을 그의 마음대로 합니다. 종에게 자유가 없는 부분은 아주 작은 일도 포함됩니다. 그가 충성된 종이라면 그는 비록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주인의 허락 없이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별 생각없이 하루를 시작합니다. 별 생각 없이 남는 시간들을 사용하고 때웁니다. 별 생각 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수다를 떨고, 만남을 약속하고 이것저것을 하고 여기저기를 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것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일을 하면서 주님의 임재를 잃지 않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대화를 하면서 주님의 표정을 살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대화를 하면서 잠이 드는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하철이나 차안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
주님의 기호
주님께 붙잡히며 그분과 동행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얘야, 나는 여기에 들어갈 수가 없겠구나. 너 혼자 가거라." 그러면 우리는 대답합니다 "그러세요 주님, 나중에 교회에서 뵙지요." 주님은 가끔 우리의 전화통을 붙잡으십니다 "얘, 지금 거기에 전화하지 말아라." 우리는 금방 대답합니다. "주님, 손을 놓으세요. 전화 요금을 내는 것은 접니다."
-
고독하신 주님
(저자가 고독감에 지쳐 전화기를 들었는데 주님이 제지하시며)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금 고독하다고 말하지만, 나보다 더 고독한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느냐? 내가 세상을 살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도 나는 너무나 고독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들은 나를 이용할 뿐이다.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외로움 속에 들어와 볼 수 없겠느냐?"
'Library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의 생각을 훔치다, 동아일보 파워인터뷰팀 (0) | 2014.12.26 |
---|---|
i am Melody, 곽윤찬 (0) | 2014.12.24 |
그림 그리고 싶은 날, munge (0) | 2014.12.21 |
건축가의 수첩, 담디 편집부 (0) | 2014.12.20 |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 오은정 (0) | 2014.12.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