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728x170
*지정웹진 1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나는 요즘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해.
아, 무작정 나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게
꼭 정국이 같다. 라고.
미묘(美卯)한 동화(冬話)
반달
발을 딛는 오르막이 미끄러웠다. 며칠 내내 쏟아지던 눈이 먼지가 잔뜩 낀 채로 딱딱하게 굳어 종종걸음을 해야만 하는 계절이 왔기 때문이었다. 이젠 정말 연탄재라도 부셔야지 이거 안 되겠네. 뽀얀 입김 사이로 혼잣말이 중얼 숨결처럼 터져 나온다. 아직도 집까지는 한참이었다. 앞으로 몇 발자국을 더 헛디뎌야 집에 다다를 수 있을까. 아, 배고프다. 계란 넣은 라면이 먹고 싶어. 이런 의미 없는 생각을 마흔 여덟 번 정도를 더 반복하면 아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민이 사는 곳은 어둠이 이르게 찾아오는 동네였다. 다른 곳보다 태양과 가까운 곳임에도 그랬다. 달과 별과도 다른 곳보다 가까워서 일까. 생명을 다 해가는 가로등 불빛이 위태롭게 깜빡이고, 사람들은 모두 연탄의 열기가 들끓는 집안으로 일찍이 숨어 들었다.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길고 고독한 어둠을 견디기 위해 준비를 한다. 벽이 얇은 집집마다서 비집고 나오는 왁자지껄한 TV소리가, 주파가 약한 라디오 소리가 지민의 깊은 밤길을 함께 했다. 그럭저럭, 지민은 외롭지 않다 생각할 수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 완연히 어둠이 가라앉은 시각에 이곳에서 사람을 마주치기란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음 그래, 조금 달랐다. 한 눈에 봐도 이곳이 초행길인 하얀 물체가 서 있는 곳에서 한 바퀴 원을 빙글 그리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에. 입김이 어둠을 조각조각 가르는 이 추운 날, 고작해야 하얀 후드셔츠만 하나 입은 채로 시선을 배회하던 그 인영이 문득 지민을 마주한 곳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는 감추지 못한 반가운 발걸음을 주춤거리며 살살 옮긴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조심히, 하지만 정확히 지민을 향해서.
“여기가 어디야?”
“네?”
아마도 그저께였나, 밤새도록 펑펑 내리던 소복한 눈처럼 경쾌한 목소리가 지민을 향해 쏟아졌다. 전혀 의중을 알 수 없는 물음표 가득한 질문을 안겨주면서. 지민이 금방 답을 찾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상대의 새하얀 목소리가 다시금 고요한 골목을 울린다.
“여기 이름이 뭐냐구.”
“여기… 이름 같은 거 없는데. 그냥 달동네지.”
“아, 됐다. 찾았다.”
갈수록 의미 모를 말을 하는 말간 얼굴은 주홍빛 가로등 아래서도 하얗게 빛이 났다. 사방의 모두가 낡은 다홍으로 거칠게 물들어 갈 때, 혼자만은 달빛에 듬뿍 물든 것처럼. 그 와중에도 발갛게 얼어버린 코끝은 꼭 알록달록. 그래,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다.
“있잖아. 나 길을 잃었어.”
“….”
“그래서 우리 집을 찾아야 해.”
아니, 정말로 이건 크리스마스 선물일지도.
뭐랄까, 지민은 제 눈앞의 소년이 마치 계절감을 상실한 어린 왕자 같다 생각했다. 사방이 얼어붙은 겨울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있으면서도 추운 줄도 모르는 듯 모락모락 따뜻한 입김으로 휘감긴 온도와, 아무리 생각 해 봐도 스무고개처럼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은 것이 꼭 어른인 지민에게는 닿을 수 없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는 것 같아서. 그 순간 지민은 아주 당연하게도 생각했다.
너는 아마,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에서 달려 나온 아이일 것이라고.
* * *
같이 갈래? 혹은 같이 갈래! 따위의 대화도 없이 둘은 자연스레 함께 걸었다. 미끄러운 좁은 길을 굳이 나란히 걸으며 소년이 꺼낸 이야기는 순간 제 귀를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달에서 왔어. 거기가 우리 집이야.
조근조근 이야기를 이어가는 목소리에는 아무리 의심을 하려 해 봐도 진심만 가득이었다. 말했지 않은가. 이 소년은 너무도 당연하게 동화 속에서 달려 나온 아이 같았다고.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어. 자신이 달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러다 어쩌다 지구까지, 그리고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농담이나 거짓말이라고 하기에는 저렇게나 열심히 조잘거리는데.
“그래서 네가 달에서 왔다고?”
“응. 그래서 달을 찾아 온 거야.”
“그런데 왜 여길 와?”
“여기가 달이라고 했잖아. 달동네.”
달을 찾아 달동네에 나타난 소년. 이곳에 오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연거푸 허탕을 치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몇 번이고 달의 발자취를 물어 여기까지, 그리고 지민에게까지 빛 그림자를 주렁주렁 달고서는 닿은 것이었다. 드디어 달을 찾았다는 듯 개운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지민은 소년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적당한 언어가 없어 발길 만큼이나 침묵은 더 길어졌고, 멈출 줄 모르는 끝없는 골목길은 두어번 정도 더 발을 헛디디게 했다. 지민이 헛디디면, 소년도 따라 헛디디며.
백서른여섯걸음, 백서른일곱걸음. 그렇게 하늘까지 닿을 것 같던 둘의 발길이 드디어 멈춘 곳은 동네의 끝자락이었다. 그저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이유로 덩그러니.
새카만 밤으로 이불을 덮은 동네가 곧 잠에 들 듯 고요히 눈앞에 펼쳐졌다. 아래로는 다닥다닥 작은 집들이 붙은 지민의 동네가 가득이고, 위로는 까마득한 아랫동네보다도 한참이나 더 넓은 하늘에 빛나는 달 하나가 겨우 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가림 하나 없이 모두 소년의 눈에 담긴 채로.
아래 위를 훑는 소년의 눈동자가 분주하다. 낯설고 신기함을 담뿍 담은 시선으로. 이내 하늘 위로 한참을 머무르는 눈빛을 보며 지민이 답을 알려주듯 입을 열었다.
“저게 달이야.”
“….”
“저기가 너희 집인데 너무 머네.”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하염없이 밤하늘을 시선으로 붓질했고, 그 위로는 가느다란 달을 두 눈 가득 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숨소리도 미동도 느껴지질 않아 지민은 순간 이대로 이 아이가 떠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달에 산다며. 그럼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소년은 한참이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눈을 깜빡, 깜빡. 시선을 쪼개가며 달을 바라보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지민이 추위에 얼어버린 입을 열어 소년에게 입김 쏟아져 내리는 말을 걸 때까지 마냥 우두커니 서서.
“너 이름이 뭐야?”
그제야 고개가 지민에게로 돌아온다. 왠지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소년의 얼굴은 담담했다.
“나? 나는 토끼야.”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고. 마침표가 너무도 명확해 지민이 할 말을 잃자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토끼야. 이름 같은 건 없어.”
“….”
“이것 봐. 나는 진짜 그냥 토끼인데.”
소년은 쓰고 있던 후드를 젖히고서는 폭신해 보이는 머리칼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새카맣게 쏟아지는 머리칼을 헤집듯 만지더니 무언가를 돌돌돌 펼치듯 꺼냈다. 입고 있는 옷 만큼이나 새하얀, 그것은 분명 토끼 귀였다. 이제는 믿기지 않는다는 말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그리고 너무도 잘 어울리는 토끼 소년. 지민은 그저 적당한 반응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을 뿐이었는데 되레 양 쪽 귀를 활짝 펼치고선 끄트머리를 쥔 손이 팔랑팔랑 제 귀를 흔들어 보이던 소년이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이게 아닌가, 방황하는 눈이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
“이 곳에서 지내려면 역시 이름이 있어야 할까?”
“….”
“그럼 저걸 이름으로 하는 건 어때? 다국? 정약? 정국?”
제 귀를 양 손으로 꼭 붙든 채로 한 곳에 머문 소년의 시선을 따라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아랫동네에 꺼지지 않은 낡은 간판들 사이에서 [다정 약국] 네 글자가 유독 짙녹색으로 빛나고 있던 참이었다.
“그냥 정국으로 하자… 정국이로 해, 너.”
그렇게 소년은, 너는, 내게 정국이가 되었다.
* * *
정국의 생활은 정말 지민의 것과는 달랐다. 잠자는 자세부터 해서 수면 시간, 씻는 방법까지.
웅크려 엎드린 채로 잠든 정국이는 불편하지도 않은 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귀만 옴싹 거릴 뿐. 그렇게 꽁꽁 숨겨 두던 귀는 긴장이 풀리면 감출 수 없는지 잠만 들었다 하면 카펫이 깔리는 마냥 바닥으로 도르르 흘러 나왔다. 축 처져서는 바닥에 가득 흘러있는 토끼 귀가 제법 컸다. 지민은 그 귀를 밟지 않기 위해 넓지도 못 한 방 안을 까치발을 딛고 살금이며 움직여야 했다.
정말 토끼 같기도, 혹은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지민은 생각했지만, 역시 그 중에서도 가장 낯설게 느낀 것은
“밥 먹어.”
“난 이런 거 안 먹는데.”
역시 밥을 먹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곤히 하루 내리를 자던 정국이 이틀 째 아침이 되어서야 일어났을 때, 지민은 출근 전에 일어나 다행이라며 서둘러 밥을 차렸다. 딱히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밥이라도 잘 먹여야겠다 싶어서. 평소 같으면 대충 라면으로 때웠을 식사도, 어젯밤 메뉴까지 고민 해 끓여놓았던 찌개와 하얀 쌀밥, 단정하게 자른 김이며 김치 같은 것들로 제 딴에는 한 상 가득 내왔다. 특별할 것도 없긴 하지만 나름 정성들여 내 온 밥상 앞에서 정국의 대답은 칼 같았다. 못 먹는 것도 아니라, 안 먹는다며.
“그럼 넌 뭘 먹는데?”
아무래도 정국이 살던 곳은 밥을 먹는 것도 다른 걸까, 섭섭할 틈도 없이 질문이 먼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렇다고 마냥 굶길 순 없잖아. 지민이 일을 나가면 정국은 하루 종일 먹지도 못 한 채 있어야 할 테니까. 가능하다면 정국에게 많은 것을 해 주고 싶었다.
물론, 정국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고.
“나는 별을 먹고 살아. 그 곳엔 그것 뿐 이니까.”
허무할 틈도 없이 지민은 생각했다.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고. 어릴 적 동화책에서도 읽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조잘거리는 저 얼굴을 보면서. 지민이도 알지? 반짝반짝 빛나는 거 말이야. 별. 반짝반짝 을 말하며 손까지 흔들흔들 해 보이던 정국은 잠시 저 혼자서 별을 떠올려보나 싶더니 피식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순간 아무것도 담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에 별을 한가득 끌어안은 착각이 들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별들은 해치면 안 돼. 그래서 빛이 꺼진 별들을 주우러 다녀.”
정국은 매일을 어둔 별을 모으는데 시간을 보냈다. 빛이 사라진 별 앞에서 반짝이던 너의 삶을 위해 잠시 기도를 하고, 우주 먼지가 잔뜩 낀 별을 툭툭 털어 깨끗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둘러 멘 주머니에 별을 수북이 쌓으며 정국은 다시 별무리 진 은하수를 총총 뛰었다.
그렇게 불룩 찬 주머니를 끌어안은 정국은 보통 수놓아진 오로라의 색이 춤을 추듯 바뀌는 것을 구경하며 별을 먹거나 빠르게 스치는 소행성이 저어 멀리까지 꼬리를 그리는 것을 넋 놓고 바라보며 오독 별을 씹었다. 오늘은 네 개만 먹자. 내일 소풍 나가서 일곱 개 먹을 테니까! 빠르게 집어 삼켜지는 혼잣말이 정국의 말동무였다. 금세 사방이 적막해 지는 것을 느끼며 정국인 더 힘차게 별을 씹었다. 오독오독.
그렇게 별을 삼키고 손에 잔뜩 묻은 별가루를 탈탈 털어내고 나서야 우주 어딘가의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돌아가는 길에도 또 다른 별을 주머니 가득 줍길 바라며.
이제, 집에 가야지.
“여긴 별은 없지?”
“아무래도…?”
마음만큼 해 줄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네. 지민인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맴돌 듯 떠올렸다.
“괜찮아. 그동안 많이 먹어둬서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ㅡ마지막 날엔 별을 일곱 개나 먹었거든.ㅡ
그리고 거짓말처럼, 정국인 그런 지민에게 대답을 해 주었고.
* * *
별을 먹는 토끼라. 별을 먹는 토끼에겐 무얼 먹여야 하지. 구루마에 박스를 잔뜩 싣고 대형마트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정리하는 지민의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과자 코너의 물건들을 보면서 이게 별 맛이랑 비슷하진 않겠지 괜한 생각도 해 보고, 그래도 이건 별이 아니어도 토끼가 좋아하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보고. 반나절을 꼬박 마트에서 보내야 하는 지민의 하루에는 순간순간 마다 온통 고단함뿐이었는데, 오늘은 그것을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정국이의 별을 생각하느라. 온종일 고민 해 보아도 결국 답은 찾을 수가 없긴 했지만 말이다.
“자, 여기.”
대신 대책은 찾았지.
“이게 뭐야?”
얼굴이 발갛게 얼어서 들어오는 정국이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기도 전에, 연탄불로 뜨끈하게 데워진 낡은 장판에 끌어다 앉혔다. 일단 입부터 벌려봐. 아ㅡ 하고 의심 없이 벌어진 입에 자그마한 무언가를 집어넣은 지민이 입을 친절하게 닫아주면서 남은 것을 정국의 장갑 위에 올려 준다. 오물거리던 입이 한 박자 늦어서야 제 손에 얹어진 것을 궁금하고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이게 뭔데? 꼭 눈으로 물으며.
“별.”
지민이 찾은 대책이라는 것은, 사실 조금 유치하지만, 뽀빠이 과자 안에 들은 작은 별사탕 이었다. 그래도 이게 가장 별 답고, 또 별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지극히 지구에, 그것도 대한민국에 사는 인간의 편협한 사고이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정국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입을 오물거리며 별사탕을 씹는 정국을 보는 지민의 눈이 기대에 가득 차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정도로 간절하게.
“이건… 너무 작은데. 그리고 가짜별이잖아.”
꿀꺽 삼키면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얼굴이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이내 살짝 울상이 되었다. 정국의 표정을 따라 지민의 표정도 함께 울상이 되어버리고. 둘 다 울적한 얼굴을 하고서 한숨을 내 쉬는데,
“가짜별도 안 돼? 그럼 이거 치울까?”
“아… 아니!”
“….”
“머… 먹지 뭐. 생긴 건 제법 닮았으니까!”
아아, 아니구나. 이내 지민의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어린다. 세상 모두가 잠든 짙은 밤하늘마냥 고요한 웃음. 정국이의 대답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도 잘 알았으니까.
난생 처음이었다. 이런 것이 달콤함이구나. 먼 우주로까지 여행을 다녀왔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들었던 그 달콤함이라는 것이, 사실 지구에 있는 이 별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온 몸 가득 진하게 퍼지는 기분에 귀가 쫑긋 솟아버릴 뻔 했다.
이곳은 너무 좋은 곳이야. 별이 아니어도 예쁘고 맛있는 것이 있어. 정국은 제 손에 소복하게 올려 진 별들을 꼭 말아 쥐었다. 너무도 소중한 것이라는 듯이. 마음 가득 기쁜 선물이라는 듯이.
* * *
정국은 지민에게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배웠다. 손으로 비벼대기만 하던 세수를 물로 하면 더 깨끗해질 수 있다는 것과, 별사탕에는 사실 하얀 별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정국이 아침에 나가 밤늦도록 돌아다니다 들어오면 지민은 꼭 선물처럼 별사탕을 가득 준비해 두었다. 그 별을 오독오독 주워 먹으며 오늘 하루는 무얼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둘이 유일하게 마주하는 하루의 끝이었다.
“너는 나가서 하루 종일 뭐 해?”
“걸어 다녀.”
“….”
“집에 가야 하니까. 돌아다니다 보면 집으로 가는 길이 보일 것 같아서.”
그런데 오늘도 못 찾았어. 실망한 눈치는 아닌 담담한 말투 아래에서는 초록색 별사탕은 옆으로 골라내며 하얀 별만 골라 먹느라 분주한 손이 보였다.
“이 별은 못 먹겠어.”
“왜? 맛은 똑같아.”
“꼭 살아있는 별 같아.”
결코 공감할 순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는 대답이라 지민은 차마 받아치질 못 했다. 얘네는 나중에 하얘지면 먹을게. 하는 목소리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 줄 뿐이었다.
오늘 사온 마지막 뽀빠이 봉지를 뜯으며 별사탕을 골라내던 지민이 정국에게 별사탕을 건네주려 고개를 들다가 어? 하고 작게 놀라는 소리를 낸다. 정국의 어깨너머로 걸려 있는 작은 창문이 새하얗게 송이송이 메워져 있는 탓이었다. 어제와 같은 새카만 밤하늘이 아니다.
눈 오네. 지민의 작은 목소리에 정국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금 지민을 봤다. 그것을 쉬지 않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저게 눈이야?”
응. 하는 당연한 목소리에 정국은 급기야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밤하늘보다 눈송이가 더 많이 보이는, 공허한 밤의 침묵을 눈뭉치의 꼬리를 잘라내는 조용한 소리로 그득 메우는 그런 함박눈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난 듯 마루에 걸터앉아 목이 꺾일 듯 하늘을 올려다보는 정국의 곁으로 지민이 앉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눈만큼이나 뽀얀 입김이 문득문득 눈송이를 가렸다.
“달에도 눈은 오지 않아?”
“응. 달에도 눈이 오지.”
“….”
“근데 이만큼 예쁘진 않아.”
그냥 먼지처럼, 별들처럼, 그냥 나처럼 떠다녀. 그러다가 우주 저 편으로 사라지지. 그러면 그 눈하고는 안녕인거야.
우주의 모두는 정처가 없었다. 나와 함께 가자 손 내밀어도, 모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떠다니는 인연이 대부분이었다. 오늘 만난 친구를 내일 다시 만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눈이 오는 날을 뭐라고 한다고 했더라?”
“겨울.”
“응, 맞다. 겨울이랬지.”
아마 지구에 와서 달이 보이지 않는 밤을 맞는 것은 처음일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도 까맣게 잊고선, 정국은 펑펑 쏟아지는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지민과 있으면 정국은 가끔 집을 잊고는 했다. 달을 찾지 않아도 더 많은 것들이, 더 신기한 것들이 이곳에 너무도 많았고, 그것을 모두 알려 줄 지민이 있었으니까.
항상 내일 아침 출근길이 꽁꽁 얼어버릴까 걱정하던 눈 오는 밤이었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서야 지각하지 않겠지 한숨 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던 그런 날에 이제는 눈이 오는 날의 따스함을, 쏟아지는 눈의 아름다움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곁이 생겨 버렸다. 그렇게 스스로가 외로운 줄도 몰랐던, 고단함이 기저에 깔린 빈자리가 TV소리보다도 즐거운 목소리로 종알종알 메워진다.
너로 들어차는 마음은 얼마나 행복한지.
함께 눈을 볼 수 있는 누군가의 옆자리가 얼마나 따뜻한지.
“진짜 예쁘다, 겨울이.”
“….”
“여긴 정말 예쁘고 멋진 곳이야.”
그리고 그 중 역시 가장 기분이 좋은 건,
ㅡ역시 지민이 이곳에 있다는 거야.
ㅡ네가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거야.
오늘 안녕 하고 손 흔들어 인사해도, 어김없이 내일이면 다시 만날 수 있는.
* * *
정국이 이 동네 지리를 모두 알게 되고, 동네 어르신 몇몇과 인사하게 되고, 무겁고 느리던 발걸음이 익숙해져 차츰 가벼워졌을 때 쯤. 쏟아져 내리는 눈을 다섯 번 쯤 마주했을 때 쯤. 기어이 해를 넘기고 정국은 아마 215살이 되었다고 했다. 몇 살이라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동그래진 눈으로 저를 보는 지민을 향해 정국은 어깨를 으쓱 해 보였더랬다. 왜? 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어.
새해가 되자마자 지민은 3일간 휴가를 받았다. 정확히는 월차에 연차까지 당겨 쓴 것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정국이 집을 찾는 걸 도와주고 싶어서였다. 아니 사실 정확히는, 집을 찾는 정국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궁금했으니까. 그리고, 정말로 집으로 떠나는 법을 찾아버린 네가 말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릴까봐. 어느 날 밤, 네가 흔적 하나 없이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까봐. 내일부터는 나도 같이 찾아줄게 하며 별사탕을 건네는 얼굴에 만세를 부르던 얼굴이 너무 환해서 그까짓 휴가쯤이야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지.
정국이 달에 돌아가는 법을 찾는 과정은 매우 단순했다. 동네 초입까지 내려가 이 큰 동네를 구석구석 골목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두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담이 낮은 남의 집 안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담벼락 아래 갈라진 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슈퍼나 약국 같은 가게 문을 벌컥 열어 선 안녕하세요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지민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더랬다. 이제 사장님들은 그런 정국의 행동이 익숙해진 눈치였지만 말이다. 정국은 그렇게 동네 꼭대기까지, 지민의 집 앞까지 올랐다.
“아, 역시 없네.”
“….”
“다시 찾아보자.”
동네를 한 번 내려다보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한숨처럼 말을 내뱉으며 다시 그 먼 길을 내려가고. 정국은 지민이 돌아올 때까지 그 일을 몇 번이고 쉬지도 않고 반복했다. 시간이 먼저 지쳐버릴 정도로 꾸준하게. 해가 완연히 저물고 달빛이 어둔 하늘을 가득 비출 때까지.
추운 겨울날, 셔츠가 땀으로 젖을 정도로 동네를 돌아다녔다. 평생을 이 동네에 발 비비고 살아온 지민이 제가 일곱 살 무렵 좋아하던 애와 자기의 이름을 적어 놓았던 담벼락 귀퉁이를 20년 만에 다시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구석구석.
얼굴까지 새빨개져서는 밭은 숨을 연신 몰아쉬는 지민의 모습을 한참만에야 발견한 정국이 우리 잠깐 저기 앉자 하며 지민의 팔을 이끌었다. 지민이네 집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놓여 있는 낡은 벤치 두 개. 여름이면 이곳에 앉아 캔 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물던 지민의 습관처럼, 정국은 매일 이곳에 앉아 한참이나 달을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가까운데,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바라보아도 돌아오지 않는 답을 기다리며.
지민은 벤치에 앉자마자 패딩 안주머니를 뒤적여 담배 갑을 꺼냈다. 정국은 그 행동을 따라하듯 주머니를 뒤적여 별사탕을 한 움큼 담아놓은 작은 병을 꺼냈다. 둘은 나란히 앉아 각자의 이유로 말없이 딸깍이며 손을 움직였다. 곧, 별사탕이 오독오독 씹히는 소리가 먼저 허공을 울렸다.
아무도 안 와. 여기서는 모자 벗고 있어도 돼. 입 안에서부터 부서져 내리는 담배 연기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함께 흩어졌다. 꽁꽁 감추듯 숨겨두었던 머리칼이 찰랑였고, 정국은 머리칼 사이로 더 깊숙이 숨겨두었던 귀를 꺼내어 펼쳤다. 하루 종일 갑갑했던 귀가 신나게 쫑긋거리며 허공에서 팔랑였다. 춤을 추는 것 같기도,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귀의 움직임을 따르듯 다리도 함께 달랑거렸다. 땅을 툭, 툭 걷어차는 작은 소음이 겨우 입이 떨어지지 않는 침묵을 달랬다.
“달에 돌아가고 싶어.”
이제 이곳은 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버린 정국이었다. 이 동네의 어떤 것도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오늘따라 달은 왜 이리도 크고 밝은지. 하늘을 듬뿍 메우는 만월은 빛으로 가득 무거웠다. 눈이 부시지도 않은지 그저 달을 보고, 또 바라보는 두 눈에도 달빛이 한아름이었다. 오늘따라 그 눈빛이 왜 그렇게 외로워 보이는지, 늘 담담한 것 같던 네가 오늘은 왜 이리 달빛에 젖어 그리워 보이는지.
어서 돌아가라 이야기 할 수 없는 입술이 끈질기게 담배 연기를 만들었다. 후우 내뱉는 구불한 꼬리 아래로 진심 담긴 한숨을 숨기며.
“그런데 이 곳 중력이 너무 무겁다.”
“….”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아.”
거짓말. 이제는 깡충깡충 뛸 수 있을 정도로 중력에 익숙해 졌으면서.
하지만 지민은 모르겠지. 진심을 숨기는 것은, 어쩌면 정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팔랑이던 귀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아랫동네를 가득 밝히던 집집마다의 작은 불빛들도 사근 잠이 들고. 남은 달 아래 번지는 빛과, 지민의 입가에서 붉게 피어오르는 담뱃불만이 어둔 고요를 밝혔다. 너무도 깊은 밤이었다. 도란도란 오늘 하루를 나누고 저무는 하루의 끝까지 남았던 둘도 이제는 잠을 청해야 하는, 그런 밤.
“어떻게 하면 중력이 가벼워 질 수 있을까?”
“그런 방법은 없어.”
“….”
“이 곳의 중력은 늘 같으니까.”
담배 불씨를 꺼트리는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실은 정국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지민은 정국을 도울 수가 없었다.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별사탕보다 더 맛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과 하루 종일 정국의 뒤를 따라 다니며 해주었던 이곳에서 있었던 어린 지민에 대한 이야기들. 너도 해 보면 분명 즐거울 거야. 라고 웃어주는, 너의 발걸음과 옷깃을 잡아 끄는 목소리 뿐. 조금만 더 나와 함께 있으라. 나와 함께 웃어주라 이야기 하고픈 소망을 담뿍 담은 숨겨진 말들 뿐.
차마 더하면 욕심뿐인 말들일 것만 같아 바닥에 떨군 꽁초를 발로 짓이기며 지민이 일어섰다. 일어선 만큼 조금 더 가까워졌지만 그래도 손 뻗어 닿을 수 있기엔 아직 한참이나 까마득한 달과 그 달을 그리는 정국을 번갈아 마주하며. 내려놓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조금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네가 나를 올려다보는데, 더욱 마음이 그랬다. 빤히 마주한 시선이 한참을 그대로 오갔다.
“그럼 할 수 없다.”
“….”
“계속 이 곳에 있는 수밖에.”
하지만 아까도 얘기 했지. 숨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정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사실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이곳엔 여전히 달이 있지만, 그 곳엔 아마 지민이 없을 테니까.
이번엔 정국이 지민을 따르듯 벌떡 일어섰다. 쫑긋 서 있는 귀를 돌돌 말아 다시 머리칼 안으로 쏙 밀어 넣고는 후드를 뒤집어쓴다. 자꾸 꺼내 놓으면 안 돼. 한 번 꺼내면 자꾸 꺼내고 싶단 말이야. 투덜거리듯 입술을 오물거리는 정국은 웃고 있었다. 외로워 보이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지민의 곁에서 지어 보이는 웃음. 혼자가 아니기에 결코 쓸쓸하지는 않은. 그 웃음.
정국은 총총 옆으로 와 지민의 패딩 점퍼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맞닿은 체온은 많이도 차가웠으나 정국은 그것이 차갑다고, 춥다고 느끼지는 못 했다. 그저 지민의 손이 제가 아는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다는 그 하나만을 알고 있을 뿐.
하루 내내 정국의 뒤를 쫓아다니던 발길이 이제야 나란히 같아졌다. 배도 고프고, 피곤하다. 어서 하루의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너와 함께.
“대신 내일도 달 보러 나올래.”
“그래, 그러자.”
이제는 잠이 들 시간이었다. 너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따뜻한 이불을 덮고, 새근새근.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네 집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에서, 너의 새로운 집을 만들자.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집을.
미묘한 동화, 끝.
|
반응형
'Culture > Mus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BTS 짐국 지민 X 정국 묵뚝뚝하고 낯가리는 사체과 남신 썰 (0) | 2023.04.20 |
---|---|
민홉 지민 x 제이홉 요원물 신입 박지민x파트장 정호석 - 첫 만남, 그리고 세번째 인사 (0) | 2023.04.16 |
#진총전력 #뷔진 안아줘 - 상대의 입이 네모나게 벌어지며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0) | 2023.04.16 |
긍정왕 멘탈갑 방탄 맏형 진의 성격 탐구 - 팀에서는 맏형이지만 가족중에서는 막내 (0) | 2023.04.16 |
방탄소년단 맏형이자 월드와이드핸섬 진(본명 : 김석진) 전설의 정색짤 (0) | 2023.04.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