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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EASY
김태형X김석진
뷔진
BGM “전기뱀장어 - 미로”
아직 잘리지 않았다. 석진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아직 잘리지 않았음은 기쁜 일일까, 슬픈 일일까. 방에서 일어나 화장실이 붙어있는 공간으로 나온다. 투룸은 이상한 구조였다. 분명 방이 하나가 붙어있는데 주인은 부득부득 투룸이라고 우겼다. 석진의 생각에 이 공간은 거실 하나 방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따지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러려니.
깔끔하게 샤워를 하고 나와서 셔츠를 입는다. 흰 색 셔츠 다섯 벌, 그레이 가디건 두 벌, 더 진한 그레이색의 니트 두 벌, 검은색 바지 세 벌을 들고 오자 유니클로 직원은 석진을 색맹을 보듯이 쳐다보았다. 뭐요, 왜요. 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인생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어팟을 꽂은 후 출근하는 곳은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석진은 이 곳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대개의 문학선생은 두 갈래로 나뉜다. 전교조를 끼고 한껏 감성적이며 참 가르침을 실현하는 문학파와 수능 등급을 위해 문학작품을 기하학적으로 쪼개며 가르치는 EBS파. 석진은 그 중 확실한 후자였다. 석진의 보충수업은 늘 빈 자리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그건 석진의 수업이 등급을 올리기에 최적화된 적당히 유머러스한 EBS 위주의 수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아주 잘생기고 젊은 것도 물론 한 몫을 했다.
배가 이만큼 나온 늙은 남자 선생들은 하루가 빠지지 않고 석진을 향해 훼방질을 한다. 거의 폐지된 거나 다름없는 야간자율학습이 이상한 이름으로 남아서 존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미혼이고 잘 생겼으며 무엇보다도 어린 석진에게 그 감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물론 그들의 퇴근시간을 한껏 미뤄 함께 퇴근을 찍어주는 것도 석진의 몫이었다. 화도 그다지 나지 않았다. 그러려니.
그러려니.
김석진의 이십대는 녹록지 않았다. 돈이 없어서 한껏 하향지원을 해서 국가 지원금을 받는 대학을 갔고 인서울 아닌 곳에서의 대학생활은 딱히. 군대를 다녀와서는 임용준비에 넋을 바쳤다. 주변은 청춘으로 가득하지 않았고 대체로 가난하거나 아프거나 쓸쓸하곤 했다. 키워준 사람은 죽고 누군가는 병원에 가고 누군가는 계속 혼자였다.
그러려니.
그런데 가끔, 아주 간혹.
예상치 못한 순간이 왔다가 지나간다.
좆됐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태형은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야자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야자를 한다는 박지민 외 여러 명을 꼬셔서 코노라도 가려고 그랬다. 담 위로 올라와 아무 생각없이 점프하려고 몸을 날렸는데 소각장을 옆에 끼고 담배를 태우는 선생을 봐서 놀란거다. 그리고는 천하의 김태형이 발을 삐끗해서 그대로 엎어졌다. 쪽팔림과 아픔이 얽혀져서 그대로 엎어져 있는데 다가온 선생이 괜찮니? 하고는 물었다. 뭐라고 둘러댈지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그 선생님이었다.
학교에 무수한 소문이 도는, 그 존나 잘생긴 문학쌤.
“저, 그 괜찮은데요.”
“너 지금.”
“아니 그게 저 원래 야자 안하는데.”
“그러니까 너.”
“다시 나갈게여. 죄송합니다.”
“아니 너 피나.”
여기에. 그 선생은 손가락으로 태형의 턱 끝을 가리킨다. 저 피나요? 헉? 하고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더니 턱 끝이 조금 찢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은 아직 버리지 못한 담배를 저 멀리에 버리고 돌아온다. 도망갈까 하는 찰나에 돌아온 김석진이 가자. 하고는 말을 걸었다. 어딜요? 하고 되묻으려다가 말았다. 젠장, 운도 존나 없지.
혼이 날 줄 알았더니만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구급박스를 꺼내 손에 대일밴드를 쥐어준다. 너 3반인가? 하고 묻는 말에 아뇨 4반인데요. 하고 대답을 했다. 석진 선생님 자리에 거울은 없어서 옆 자리 영어선생님 자리에 놓인 거울이 태형의 앞으로 다가왔다. 태형은 어색하게 거울을 보며 턱 끝에 대일밴드를 붙였다.
“너 손바닥도 다 까졌다.”
“…그르네요.”
손 줘봐. 연고를 약지에 꾹 눌러짠 선생님이 태형의 손바닥에 약을 발라준다. 검은 머리칼 밑으로 선생님 얼굴을 왠지 좀 훔쳐본 것 같다. 학교는 왜 돌아왔어? 묻는 목소리가 수업 때랑은 조금 달랐다. 좀 조근 조근한 느낌. 원래는 말투가 좀 다정한 듯한 모양인지.
“아, 그.. 친구 기다리려고요.”
“데리고 나가려고?”
“아뇨? 아뇨.”
고개를 파닥 젓는 태형을 보며 석진이 픽 웃는다. 공부하는 애들은 냅두고 가. 미련 없이 일어난 선생님은 태형을 그대로 두고 텅 빈 교무실을 나선다. 태형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니까, 저 문학선생이 나를 교무실에 데려와서 약 발라주고 그런 게 뭐가 대수라고. 멍청하게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일어나 교무실에서 나선다. 컴컴한 학교에서 새카맣게 빛나는 눈동자가 굴러다닌다. 걸음도 빠르시지. 그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반에 여자애들 세 네 명 정도는 저 문학쌤을 진심으로 좋아하거나 덕질하거나 사랑하고 있다. 그게 불만인 여드름투성이 남자애들은 모여서 멋대로 김석진에 대한 좋지 못한 추리를 했다. 게이일 것이다, 혹은 늙어서 안 설 것이다. 근데 그렇다고 하기엔 가끔 걷어올리는 소매 셔츠 밑의 팔뚝이 제법 남자답기도 했다.
어. 내가 그런 걸 언제 훔쳐봤었지.
좆됐다고 생각했다. 순순히 학교를 빠져나가 집에 도착해 침대에 누울 때까지도 약 발라주던 그 얼굴과 약지가 잊혀지지가 않아서.
어차피 매일 보는 선생님인데 뭐 다를게 있나 싶은데, 그 다음날 김석진은 머리를 조금 바꾸고 왔다. 약간 쉼표 머리. 아니나 다를까 여자애들이 반쯤 정신을 놓고 책상 밑으로 폰을 숨겨 카톡을 나눈다. 이마 좀 깐 거 가지고 되게 유난떤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머리를 좀 깔 수도 있고 그런거지. 이마가 번듯하고 반듯하다. 수업이 다 끝나고 애들이 한웅큼 빠져나간 학교에서 익숙한 태의 선생님이 복도 끝에서 튀어나온다.
등에 뭔가가 붙어 있었다. 태형은 미끼에 홀린 물고기처럼 그걸 쫓아서 석진 뒤를 조용히 밟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내꺼’, ‘MINE’, ‘석진쌤입술오동통’ 같은 이상한 포스트잇들이 등에 세 개나 붙어있다. 가끔 보면 그 여자애들 좀 소름 돋는 부분이 있다니까. 가까이 다가간 태형은 복싱 도장에 다니며 민첩하게 다져진 몸을 움직이고 손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포스트잇 세 개를 떼어내 손에 쥐었다. 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데 그가 뒤를 돌았다.
“뭐해?”
“…….”
굳은채로 손에 들린 포스트잇을 허망하게 뺏겼다. 석진의 눈이 태형을 향한다. 그 눈 마주치자 마자 태형은 다급히 도리질을 쳤다. 저 아닌데여. 그 말에 석진은 알아. 하고는 세상에서 제일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우리반 애들이 붙였겠지. 고맙다. 포스트잇은 그대로 손 안에서 구겨져 근처 쓰레기통으로 향한다. 종이랑 같이 마음이 바사삭 구겨진다.
존나 어른 냄새, 남자 냄새. 이상한 충동이 든다. 저 선생님이랑 싸워보고 싶거나 심지어 이겼으면 좋겠고, 그것도 아니면 막 엄청 속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의 앞에서 울거나 아님 선생님이 내 앞에서 울거나 했으면 하는 바람.
아주 이상하게 어그러진 욕망들.
자꾸만 눈을 뗄 수가 없다.
김태형이 교무실 구석에서 엎드려뻗처를 하고 있다. 학주가 또 한바퀴 산책을 돈 모양이었다. 석진은 아무것도 못 본 척 무심하게 자리에 앉았다. 석진 왼쪽 자리를 지키고 있는 4반 담임이 와서는 석진에게 말을 건다. 40대의 미혼 여성. 석진에게 호감도가 높은 편이었다. 쟤 때문에 고민이 많네요, 하필 주임 선생님한테 걸려서. 석진은 수행평가지 채점을 하며 눈도 떼지 않고 상냥하게 대답한다.
“사고 친 건가요? 무슨 일이에요?”
“착한 앤데 가끔 욱해서 저래요.”
“욱이요?”
별로 그런 스타일 같진 않았는데. 석진은 말을 하다가 입을 꾹 다문다. 어머, 석진쌤! 태형이를 아세요? 묻는 말에, 예, 뭐. 수업 들어가니까요. 최대한 건조하게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요. 애가 착하거든요. 능글하니 싹싹하고. 근데 요새 양아치 애들이랑 척이라도 진 건지 저렇게 싸움을 하네요. 제가 정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저 친구 부모님이 지방에 계셔서 학교에 모시기도 그렇고 혼자 살아서 마음 많이 쓰이는 애인데요.
TMI. 정보가 과하다. 석진은 최소한의 대꾸를 하는데 옆 선생님의 수다가 멈출 생각을 하지를 않았다. 어쩌다보니 김태형의 아버지가 판사이며 원래는 서울에 있었는데 비리에 휘말려서 지방 법원으로 발령을 갔다느니 엄마는 진작 이혼했는데 무슨 대기업 집안의 막내딸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쟤 친구들은 또 그런 거 모르더라고요. 애가 그런 걸 숨기는 모양인지. 저도 뭐, 학부모 상담 하다가 우연히 안거지만. 그래서요, 비밀이에요. 애한테 아는 척은 하지 마세요. 석진 쌤이 뭐 그럴 일은 없으시겠지만. 흐흥.
없지. 원래라면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날 일이 없었다.
헉, 미친. 김석진이다. 태형은 눈이 동그래졌다. 지지리도 운이 없는 하루였는데 왠열. 학교 꾸석에서 3번 상대랑 치고 받고 싸우다가 학주한테 걸려서 하루종일 시달렸는데, 어쩐일로 일찍 퇴근한 김석진의 너른 뒷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태형은 주변을 살핀다. 다시 살펴도 여긴 태형의 동네였다. 학교에서 버스로 네 정거장 정도. 거기다 근처에 대학을 끼고 있는 빌라촌이라 고딩들은 잘 없는 곳이었다. 동네에 유명한 분식집이 하나 있는데 석진이 거기 서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한 손에는 폰을 들고는. 누가봐도 집 가서 밥 해먹기 귀찮아서 대충 끼니 해결하고 가려는 그런 폼이었다.
입술 옆에 얹어진 피딱지를 약지로 살살 만지작거리며 석진에게 다가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줌마에게 아는 체를 했다. 여긴 태형도 단골인 집이니까. 석진이 슬쩍 옆을 보고는 조금 놀라는 게 보였다. 선생님이 나한테 아는 체를 해줄까? 십 초 정도 기다렸는데 말을 걸어주지 않길래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 보았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다.
“어, 선생님?”
“아.. 어, 안녕.”
꼬지에 떡볶이 꽂아먹는 김석진 선생님이라니. 부지런히 움직히고 있던 입술이 조금 당황스러워보였다. 안녕하세요. 요 근처 사세요? 하고 태형은 태연하게 말을 건다. 그 사이 얼굴을 빼꼼 내민 아줌마에게 떡볶이에 야끼만두 섞어주세요. 하고는 맨날 하던 주문을 했다. 석진은 대꾸 없이 고개만 대충 끄덕거린다. 그러시구나아. 하고 태형도 어색하게 대답을 했다. 정적을 못이긴 건 선생님이 직업인 김석진이었다.
“얼굴은 왜 그래.”
“아, 오늘 누구랑 쪼금 싸웠어여.”
“걔가, 괴롭힌거지?”
“네.”
태형은 앞에 나온 떡볶이를 두 어개 입에 집어 넣는다. 저 여기 전학왔거든요. 작년에. 그 때 제가 이제 키가 160이 조금 넘었어요. 전학 온데다가 작으니까 걔네가 진짜 심각하게 괴롭혔단 말이에여. 근데 도장다니면서 하루에 우유 세 통씩 마셨더니 일 년 만에 키 엄청 크고 몸이 좀 단단해지는 거에요. 그래서 그 때부터 저한테 또 시비터는 놈 있으면 복수를 합니다. 한 놈 씩. 오늘은 제 복수 목록 3번에 있던 애가 발을 걸길래. 참지 않았죠.
태형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 낮에 4반 담임에게 들은 얘기랑은 제법 다른 느낌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면, 버석하고 건조할 줄 알았는데 세상 아무 생각이 없어보였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윤리 의식은 없었지만 그래도 선생이니까 싸우지 말라고 입 바른 소리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저기요 쌤.”
“왜.”
“애인 있으세요?”
“그런 건 왜 물어.”
“알려주시면 안돼요?”
이런 애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무시하는 방법을 다섯가지 정도 알았다. 저기요, 하고 아줌마를 불렀다. 이 친구꺼랑 제꺼 같이 계산해주세요. 하고 만원 짜리 한 장을 내미는데 태형이 선생님. 하고는 다시금 석진을 불러 세운다. 단정하지만 조금 피곤한 얼굴로 돌아보는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한 태형은 지금 세상에서 제일 궁금하다. 아랫속눈썹이 진한 그 눈이 너무 반짝거리며 빛이 나서 석진은 하마터면 대답을 할 뻔 했다.
“제가요, 다신 안싸울게요.”
“뭐?”
“선생님 애인 있는지 없는지 알려주시면 이제 다신 안싸울게요.”
잔돈 2천원이에요. 석진은 아줌마가 주는 잔돈을 받아 들었다. 태형은 그 사이에 꼬지에 떡볶이를 무진장 빠르게 꽂아 입에 넣어버렸다.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선생님이랑 같이 자리를 뜨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행동이었다.
“없어.”
“…으얼쥴 알아어여.”
“놀리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태형이 입술 끝에 떡볶이 양념이 그대로 묻어있길래 아무 생각도 없이 엄지로 스윽 닦아줬다. 그리곤 후회했다. 곧장 파르르 흔들리는 눈, 그걸 또 보고 말아서. 서둘러 이야기의 방향을 돌린다.
“약속 지켜.”
화나도 참아. 싸우는 건 안 좋은 거니까. 석진이 그렇게 말을 하자, 옙 알겠숩니다. 하는 태형의 대꾸가 신이 나있었다. 곧장 집에 돌아가는데 자꾸만 태형이 쫓아온다. 금세 갈 줄 알았는데 계속 쫓아온다. 아니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아보였는데. 가라고 단호하게 말을 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태형이 먼저 입을 연다. 부루퉁한 얼굴이다.
“저기요, 쌤.”
“…….”
“여기 근처 사세요?”
“…너 집에 안가니?”
“제 집이 여긴데요.”
해오름빌 앞에 서서 석진은 뒤를 돈다. 너, 여기 산다고? 다시 되묻는다. 투룸이라고 우기는 원룸. 태형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네. 저 여기 사는데요. 쌤은 왜 여기까지 오신거에요? 안데려다 주셔도 되는데.
석진은 짧게 한숨을 내쉰다. 몇 층이야? 묻는 말에 태형은 꼴깍 침을 삼킨다. 지금, 내 방에 가겠다는 그런 의미인가. 석진이 몇 층이냐고 물었을 뿐인데 태형의 머리는 치우지 않은 빨래들이 쌓인 침대를 떠올리고 있다. 쌤이 그런데 눕는 건 안되는데. 그러다가 순식간에 너무 속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내 방에 있는 김석진 선생님을 감히 밖에서 상상해선 안되는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인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김석진 쌤을 좋아하고 있지. 좋아하게 되었지.
“난 2층.”
“예?”
잘 쉬고. 약 챙겨 바르고. 선생님은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톡톡 건드리고는 빌라 입구로 사라졌다. 잠시 멍충하게 굳어있던 태형은 호다닥 석진을 쫓는다. 정말로 203호 도어락 버튼을 익숙하게 누르고 그 안으로 김석진 선생님이 사라졌다. 멍하게 한 계단을 더 올라 303호 앞에 서서 태형도 도어락을 눌렀다. 운동화를 벗고 엉망이 된 집에 오도카니 서서 발 아래를 쳐다보았다. 이 아래에 김석진 선생님이 산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울렁거리는 속을 무시하고 침대에 폭 파묻혔다.
체육대회 같은 학교 행사는 수업을 하루종일 안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석진은 애들이 맞춰준 반티를 입고 계주 총을 쏜다던지 하는 잡일을 아무 생각 없이 하고 있었다. 멍하게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태형이 저 멀리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설마 이 쪽으로 오는 건가 싶어서 움직이던 발걸음이 멈춘다. 쌔앰! 하고는 부르는 목소리가 아무래도 부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뛰어온 태형이 헥헥 숨을 고르다가 파란색 포카리스웨트를 손에 쥐어준다. 더운데 이런거 드시고…, 까지 말을 했는데 퍽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김태형 뒷통수를 향해 흰 우유곽이 터졌다. 덕분에 마주보고 서있던 석진의 얼굴에도 우유가 튀어 묻었다. 석진이 눈을 깜빡거린다. 근처에 있던 애들이 다들 놀라서 숨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 건 그 애인데 그 애 눈이 석진의 얼굴을 살핀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본 태형의 눈빛이 어땠는지 석진은 보지 못했다. 다시 석진을 돌아본 눈 속에 잠시 불꽃이 일렁거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쌤 여기 묻었어요. 아이구. 그 애가 손등으로 석진의 얼굴을 슥슥 닦았다. 석진이 그 손을 잡아 내리고 얼굴을 살핀다. 화난 기색을 꾹 눌러 감추는 얼굴.
“저 완전 튼튼하져.”
“…….”
“저 아니었음 쌤이 맞았을 지도 몰라요.”
쌤은 이거 드시고요. 태형은 석진에게 캔을 쥐어주고는 바닥에 다 터진 우유팩을 집어 든다. 남은 우유를 보란듯이 탈탈 털어먹고 꾹 쥐어서 쓰레기통에 버린 태형은 다 젖은 흰 뒷통수로 자기 반을 향해 유유히 사라졌다. 석진은 마음이 조금 쓰인다. 저 애, 참으라니까 진짜 참았네.
석진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움직여 우유를 던진 것으로 보이는 애를 확인했다. 8반에 유명한 양아치였다. 요새 학교에는 김태형이 양아치들을 한 명 씩 꺾고 다닌다는 소문이 돈다고 했다. 그런 거 아닌데. 그 애는 그냥 자길 괴롭히는 애들을 참지 않는 거였다. 그리고 이제는 참기로 했고. 석진은 파란색 캔을 손에 꼭 쥐고는 8반이 앉아있는 대열을 향해 간다. 너지? 방금 우유 던진거. 그렇게 묻자 아닌데요, 하고 웃는 폼을 보니 반성의 기미라고는 전혀 없었다. 석진은 이럴 때마다 직업에 깊은 환멸을 느낀다.
“너 환웅이 맞지?”
“…….”
“학폭위 한번 더 가면 퇴학이라며.”
삶을 신중하게 살아야지. 아직 스물도 안됐는데. 응? 석진은 똑바로 쳐다보며 현실을 읊는다. 그 애는 그게 꼴사납다는듯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가래침을 모은다. 들어봤자 듣는 애가 아니라는 걸 안다. 저러다 망해 구겨질 인생이라는 것도. 따로 더 이상 뭐라하지 않았다. 그냥 구겨지게 냅두는 게 최악의 훈육이었다.
석진은 오늘도 그 집에서 떡볶이를 먹는 중이었다. 옆으로 슬쩍 붙는 어깨가 돌아보지 않아도 김태형인 걸 알았다. 쌤, 오늘 조환웅 혼내셨다면서요. 그 애는 그게 그렇게 신나는 모양이었다. 석진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태형은 궁금하다. 왜 이 선생님은 이렇게 무미건조할까. 색을 입혀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선생님.”
“되니까 행복해요?”
“응.”
“왜 대답 안해줘요?”
했잖아, 행복하다고. 석진의 눈이 그렇게 말을 한다. 행복이랑 거리가 멀어보이는데. 태형은 떡볶이를 입에 쏙 집어 넣으며 괜히 중얼거린다. 석진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너는 왜 공부 안해. 대학 안가?”
“공부 재미없잖아요.”
“공부를 재미로 하니.”
아니 제가 꽤 건강한 편이라 팔십 살까진 살 것 같은데 팔십 살까지 사는 인생에 굳이 재미없는 거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요. 아무 논리 없는 말을 꽤 단호하게 말을 해서 석진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네가 놔버린 이 순간 때문에 팔십까지 고생하면서 사는 건 괜찮고?”
오, 역대급으로 긴 대답. 정이 뚝뚝 떨어져 있는 대답. 시크한 대답. 태형은 석진을 빤히 본다.
“쌤 근데 일부러 그러시는 거에요?”
“뭐?”
“그런 사람 아닌데 그런 사람인 척 하는 거.”
“……?”
“제가 말이 서툴러서.”
그, 선생님 보면 그런 거 있거든요. 다정한 거 같은데 아닌 척. 정 많은 데 아닌 척. 실은 엄청 좋은 사람인데 아닌 척. 다정하고 정많고 좋은 사람이면 꼭 안되는 것처럼. 좋은 색은 다 빼고 회색만 남겨둔 거 같고 그래요. 석진은 대꾸가 없다. 좆고딩 김태형은 불쑥 선을 넘은 것 같은 느낌에 불안해진다. 얘가 뭐라고 이러나 이제 나를 무시하면 어떡하지. 나는 선생님이랑 더 친해지고 싶은데. 태형은 황급히 석진 앞으로 오뎅국물을 뜬 종이컵을 놔준다. 아뜨.
“저 사실은 그림 그리고 싶은데요, 그림 그리면 배고플 것 같아서요.”
“…….”
“저 되게 부잣집에서 살았거든요, 중딩 때까지는.”
구질구질한 건 싫어서. 공부나 해볼까봐요.
석진은 세상이 너무나도 쉬운 이 애가 신기하다. 싸움도 맘 먹으면 다신 안할 것처럼 구는 것도, 공부도 하면 금방 잘 될 것처럼 얘기하는 것도. 태형은 석진에게 얼굴을 보여주며 웃고 있다. 내 앞에선 이 애가 기분이 너무 좋아보여서 그래서 얘 앞에서는 무색인 척 하는게 무의미해진다.
“열심히 해.”
“네?”
“공부 말야. 열심히 해서 구질구질 안하면 좋잖아.”
나도 그게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거든. 석진은 그 말을 하며 국물이 든 컵을 호호 분다. 동그랗게 말리는 입술을 쳐다본다. 석진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는 찰나에 태형이 먼저 만원을 아줌마에게 내밀었다. 이 선생님꺼랑 같이 계산해주세요. 석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금 이 애가 계산하는 장면을 구경만 하고 말았다.
“저 돈 많아요.”
구질구질 한 거 싫어한다니까여. 날 꿉꿉한 게 비올 것 같지 않아요? 아주 쉽게 화제를 돌려놓고 태형이는 뒷걸음질치며 손을 빠빠이 흔든다. 집으로 향하는 게 아니었다. 저 지금 어디가냐면 문제집 사러. 쌤이 공부하라고 했으니까. 열심히 할 거에요. 진짜로. 들어가세요!
꾸벅. 걸음까지 완벽하게 쉽고 가벼웠다.
일요일 저녁 콩콩거리는 소리에 석진은 아무 생각도 없이 문을 연다. 일요일이니까 택배도 아닐텐데. 문 밖에는 태형이 서있다. 세상에. 그대로 닫히려는 문 사이로 그 애의 허벅지가 쑥 들어왔다. 쌤! 저 좀! 태형은 그 틈 사이로 쫑알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쉬시는 날 방해해서 진짜 죄송한데요.”
“…….”
“저 진짜 세탁기가 망가져서요.”
5분만 걸어가면 코인세탁방 있는 건 태형도 알고 석진도 아는 사실이지만, 윗층에 이웃사촌 선생님을 냅두고 굳이 빨래를 하러 그렇게 멀리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제가 학생인데 내일 교복은 입어야 하지 않겠어요? 입만 살아서 태형은 힘껏 석진을 설득한다. 코 끝까지 오는 동그란 안경에 품이 무지 티셔츠를 입고 무표정하게 서있던 석진이 결국 한쪽으로 조금 자리를 비켜준다. 문을 열고는 김석진 선생님의 방 안으로 태형이 쏟아져 들어온다.
태형은 세탁기를 열고 신중하게 빨래를 돌린다. 킁킁, 섬유유연제의 향기를 맡아본다. 한 두 번 돌려본 솜씨가 아닌지. 석진은 경계하는 태세로 거실 구석에 앉아있다. 크지 않은 거실엔 보통 원룸에서 보기 힘든 책장이 있었다. 역시 문학 선생님이라 책이 많구나. 태형은 석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책장 안에 책을 꺼내어 들고 펼쳐본다. 책 맨 앞장에는 익숙한 석진의 필체가 있다. 매일 칠판에 적히는 글씨로.
2012.7.8
개구리서적. 사랑니 빼고 오는 길에.
2016.5.5
교보문고 광화문점. 베스트셀러라길래
2007.12.4
생일선물. 아빠가
“이거 뭐에요, 날짜?”
“책 샀던 날 기억하려고.”
“쌤 생일 12월 4일이에요?”
머쓱하게 티비로 향해있던 석진의 시선이 태형에게 향한다. 대꾸는 딱히 없고 긍정의 눈빛이 와닿았다. 그렇구나. 12월 4일. 소득이 좋다. 태형은 기분이 한껏 좋아진 채로 소파 끝자락에 앉는다. 2인용짜리 소파에 둘이 나란히 앉아있으니까 기분이 간지러웠다. 태형은 멋대로 슬근히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꾹 눌러 내린다. 내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너무 티나서 선생님두 다 알까? 쌤은 어른이니까 알겠지.
“학생한테 고백 받아봤어요?”
“…….”
“받아봤죠.”
“받아봤지.”
그래서 전근왔어. 그 여자애가 안 만나주면 옥상에서 뛰어내린다고 하길래.
생각보다 훨씬 이상하고 기괴한 이야기가 튀어나와서 태형은 눈이 동그래진다. 진짜여? 물으니까 석진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농담을 하시네. 태형은 놀란 속을 달랜다.
근데 그 애, 옥상에서 떨어지는 대신에 소문을 냈어. 나랑 자기랑 잤다고.
“예?!”
“그래서 전근왔어. 이건 농담 아냐.”
원래 그 나잇대 애들이 좀 이상하게 맹목적이고 그런거잖아.
그런 말을 하는 선생님이 유독 지쳐보였다. 죄책감들게시리. 나도 꽤 맹목적이고 이상하게 선생님이 좋은데.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쌤이 별로 안 좋은 사람인 척 하는 이유. 색을 쏙 빼고 무채색인 척 하는 이유. 잘 생긴데다가 사람까지 좋으면, 그걸 나 말고 다른 애들도 알아버리면 선생님은 매번 이런 소문들 속에 축축히 젖어갈 수도 있었다. 그건 싫지. 태형의 입술은 꾹 다물어져 일자가 된다.
“무슨 영화 좋아해요?”
“…….”
“우리 영화나 봐요. 빨래 돌아가는 동안.”
태형은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린다. VOD를 살펴볼까 했지만 영화를 고를 때 신중해지는 순간조차도 싫어서 오씨엔을 틀었더니 타짜가 하고 있었다. 화면 왼쪽 상단에 노란색 동그라미 속, 19세. 나는 애 아니니까 내버려두고 쭉 봤다. 선생님은 한 쪽 무릎을 세우고 안은 자세로, 더 이상 수수할 수 없는 모습으로 옆에 있었다. 여러 버젼의 김석진을 보았지만 -그래봤자 수업하는 김석진쌤, 반티 입은 김석진쌤, 담배를 등 뒤로 감추던 김석진쌤 정도로 추릴 수 있겠다- 그 중에 수수한 선생님이 가장 좋았다. 이건 나만 본 모습일거니까. 선생님은 매일 저런 수수한 모습으로 밤을 보내고 혼자 술을 마시겠지. 왜냐면 현관문 앞에 잠시 쪼그려 앉아서 작은 종이박스에 그득하게 쌓여있던 355ml 맥주캔들을 봤거든.
타짜가 방영하는 내내, 나는 하나의 대사도 귀에 담지 못하고 선생님만 담아왔다.
축축한 교복을 쥐고 내려와서 행거에 교복을 널어놓고 그저께 사서 새 것인 문제집 첫 장을 폈다. 그저께샀지만 당당하게 오늘 날짜를 적는다.
2018.5.9
신유문고
펜이 잠시 고민을 한다. 검은 똥이 나올까봐 메모장에 한번 대충 휘갈기고는 세상에서 제일 오글거리는 마음으로 남은 글자들을 적었다. 적고 혼자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집어 던졌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펜을 다시 쥐어들고 놓은지 오래된 공부란 걸 해보기로 했다.
2018.5.9
신유문고
12월 4일
나의 수수함에게 고백하기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돌아가는 길에 복도에 가득 몰린 아이들 때문에 길이 막혔다. 석진은 큰소리를 절대 내지 않는 편이라, 무슨 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잔뜩 흥분한 애들에게 묻혀버렸다. 교과서로 애들 사이를 훑으며 지나간다. 아무래도 싸움이라도 났는지. 얘들아. 비켜봐. 침착하다 못해 땅으로 꺼져가는 기분으로 그 애들을 다 훑고 지나갔는데 복도 구석에 그 애가 동그랗게 나동그라져 있었다. 8반 그 새끼는 분이 안 풀리는지 석진이 가까이 다가와도 발길질을 멈추지 않는다. 석진이 조용히 입을 연다.
“야.”
“…나를, 씨발, 개무시를 해.”
“야!!!”
교과서를 집어던진 석진이 태형에게 발길질을 하는 그 애의 교복을 잡는다. 어른에게 멱살을 잡힌 애가 순간 겁에 질린 게 보였다. 작지 않은 석진의 힘에 떨어진 그 애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태형은 한 대도 건드리지 않고 그냥 맞고만 있었다. 가드를 올렸던 팔을 내리자 얼굴에 잔뜩 생채기였다. 맞고만 있을 애가 아닌데 맞고만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쟤한테 싸우지 말라고 해서.
일어나, 김태형. 석진은 태형을 일으켜 세운다. 아직도 악에 받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 애가 선생이라도 한 대 칠 기세였다. 석진은 태형을 뒤에 두고 다가가 옷 매무새를 다듬어주고 어깨를 쓰다듬었다.
“집에 가.”
“…….”
“퇴학이니까.”
낮게 퍼진 목소리를 그 주변에 있던 애들이 다 들었다.
야 문학 빡치니까 존나 무서워. 김태형이랑 아는 사이래? 왜 저래. 교과서 집어던졌어. 미쳤다. 조환웅 퇴학이래? 김태형은 왜 저러는데. 아예 때리질 않던데. 쟤 일부러 안 때렸어.
그 유난스러운 소란 사이를 둘이 지나갔다. 절뚝이는 태형은 남모르게 웃으며 석진의 단단한 팔에 마음껏 의지하고 있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태형은 순대국을 입에 푹 떠넣다가 으에아아 하고는 한껏 아픈 척을 했다. 옴찔하는 석진의 얼굴을 다 봤다. 선생님은 지금 나한테 죄책감 비슷한 걸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랑은 좀 이른 것 같아서 죄책감이라도 좋다. 화도 좋고 죄책감도 좋으니 어떤 감정이든 나한테 많이 느껴줬으면 좋겠는 바람이었다. 떡볶이에서 순대국으로 식사가 작은 업그레이드가 된 것도 좋았다.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나아가면 되는 거지.
“감동하셨죠, 솔직히.”
“뭐가.”
“제가 선생님이랑 한 약속 지켰잖아요.”
싸움 안하는 거요. 잘했죠. 웃는 태형을 보고 석진은 따로 대답을 하진 않는다. 태형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컴퓨터용 싸인펜을 꺼낸다. 쌤, 손 좀 줘봐요. 석진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태형은 꽤나 신중하게 석진의 손바닥에 작품 세계를 펼친다. 거친데 이상하게 아기자기한 그림이었다. 아니면 석진의 손바닥 안에 거대한 자신의 뭔가를 담아내기엔 화폭이 조금 작았는지.
석진은 누군가 등을 지고 서있는 것 같은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태형아.”
“…예?”
“잘했어.”
펜뚜껑을 닫는 그 애는 사소한 질문을 하는 것이 취미면서 되묻지 않는다. 태형은 상처투성이인 얼굴로 가만히 눈을 굴린다. 뭘 잘했다는 건지, 내가 싸움을 안한 거? 아니면 손바닥에 그림을 그려준 거? 그것도 아니면 선생님을 좋아하는 걸 잘했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혹시 세 번째가 정답이면 당장 뽀뽀하고 싶을 것 같아서 묻는 걸 참는 거다. 그래도 ‘태형아’ 소리랑 칭찬은 계속 듣고 싶었다.
“쌤, 저 공부하거든요. 요새.”
나의 수수함이 웃는다. 너무 좋아.
“진지하게요. 저 진짜 진지하게 공부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열심히 할게요.”
“…….”
“대학 갈래요.”
그리고 스무살도 되고 어엿한 어른이 되면 355ml 맥주캔도 살 수 있을거고. 수수한 차림의 선생님 옆에서 같이 수수해진 채로 맥주 한 잔 할 수 있겠죠. 그랬으면 좋겠다. 그 소파에 앉아서 뽀뽀 말고 키스하고 키스가 지나면 섹스도 하고. 그러려면 좆빠지게 공부해야 되는 미자 신세지만.
선생님이 도망갈 게 뻔해서 내 모든 마음을 넉넉히 담은 고백은 우선 아껴두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새 문제집을 뜯는다.
2018.5.16
신유문고
나한테 태형이라고 했다.
문제집 두 권을 이주만에 뽀개고 태형은 제 집 드나들듯 서점을 들락날락했다. 온갖 종류의 문제집들이 탐스러운 열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문제집을 가득 결제하고 있는데 요새 유행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꼭 선생님이 동네에서 떡볶이를 먹을 때 저런 표정이던데. 태형은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책을 같이 산다. 책 맨 앞장에는 오늘 날짜를 적는다.
2018.6.4
신유문고
문구를 잠깐 고민했다. ‘태형이가 선생님에게’ 라고 쓰긴 싫었다. 얄팍하고 알량한 자존심에.
그래서 문구 대신에 밑에는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 손바닥에 그려준 거랑 똑같은 걸로. 선생님은 모르는데 그거 사실 키스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한 명의 뒷모습만 보였겠지만, 그 앞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태형은 그 그림을 그 책에 몰래 그리면서 조용히 웃는다.
좋아해. 너른 어깨 뒤에 내가 숨어있어서 말은 못하지만.
교무실에 그 책을 놓고 돌아왔다. 수업에 들어온 김석진 선생님의 셔츠는 반팔로 바뀌어 있었다. 여자애 하나가 어제 68 페이지까지 진도를 나갔다고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통이 조금 넓은 듯한 그 셔츠 아래에 단정하게 드러낸 살갗을 보며 태형은 가만히 턱을 괸다. 그 목소리로 ‘겨울 사랑의 편지’를 읽는 선생님은 좀 반칙인 것 같고.
교과서 들여다 볼 시간이 부족하다. 눈에 빼곡히 담기도 모자라서. 열감이 올라오는 교실 사이로 다들 교과서를 보는 타이밍에 김석진과 눈이 마주친다. 푸르고 연한 눈빛이다.
나만, 여기서 오롯이 나만.
선생님이. 김석진이 무채색이 아님을 알고있다.
I'M not EASY
김태형X김석진
뷔진
BGM “치즈 ㅡ 거짓말처럼”
야자감독을 마치고 집에 가면 보통 아홉시에서 아홉시 반 정도가 된다. 이때쯤이면 분식집도 문을 닫아서 선택권 없이 편의점으로 향해야했다. 맥주 몇 캔과 먹을 것들을 의욕 없이 고르고 나와 빌라 앞을 지나가는데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커다란 외제차들이 빌라 입구를 막고 있었다. 옆으로 지나가야만 했다. 203호 문을 열고 돌아가서 욕실에서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낸다.
밥은 뒷전이고 맥주부터 삼켰다. 쿵, 윗층에서 소리가 난다. 잠시 천장으로 들렸던 눈을 내리깔았다. 참견하지 말자. 그 애의 집이 부자라는 것도 우연히 알았고, 그 애의 방이 우연히 내 방 위라는 것도 알았지만 참견할 필요가 없다. 손이 차갑게 식었는데 맥주캔을 놓을 생각을 못했다. 딱 한번만 소리가 더 나면 당장 올라갈 마음이라 애를 쓰며 참고 있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이 지나간다. 아무 소리도 없이.
아침 출근길에 그 차들은 쫙 빠지고는 없었다. 석진은 흘긋 위를 쳐다보았다가 출근을 서둘렀다. 2교시 4반 수업에 들어갔을 때 저도 모르게 태형을 찾고 있었다. 그 애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펴놓고 있다. 생채기도 없고 단정하기만 한 모습이었다. 아, 다행이다. 긴장이 놓이자 마음이 조금 머쓱해졌다. 누군한테 마음 써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석진은 수업을 하는 내내 태형을 살폈지만, 그 애는 고개를 잘 들지 않는다. 매일 별가루처럼 시선이 쏟아졌던 것과는 좀 다르게.
“여기선 싫어요.”
“그게, 6반에서 오늘 진로상담한다고 예약을 다 잡아놔서.”
그러지 말고 태형아. 어제 선생님이 어머니한테 전화했다가 그대로 끊겼거든, 어머님이 혹시 많이 화가 나셨니? 4반 담임은 태형에게 끈질긴 구석이 있다. 어쩌다가 전화를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연유로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세단들이 빌라 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음이 설명이 되었다. 김태형이 입을 다물고 있는데 담임은 끝도 없이 파고들려고 했다. 듣는 귀가 신경쓰이는 쟤 마음도 모르고.
“어? 태형아.”
귀가 없는 척 하던 석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다. 갑자기 일어난 석진 때문에 간이 작은 4반 담임은 파드득거리며 놀란다. 그 애의 형형한 눈이 여기 와닿는 게 느껴졌다. 나서지 않고 입 다물고 있는 게 원리원칙인 석진이 드문 결정을 한다.
“상담실은 아니고 특별활동실이 아마 비어있을 거에요.”
“예?”
“6교시부터 제가 쓴다고 했었거든요.”
어머, 고마워요. 석진쌤. 4반 담임은 마치 친자식이라도 되듯이 태형의 팔을 붙잡아 일으킨다. 태형은 아무 말도 없이 교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자리에 털썩 앉은 석진은 옅게 한숨을 내쉰다. 단정한 책꽂이에 그 애가 준 분홍색의 책이 꽂혀있다.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그 앞장에 그려놓은 그림은 그 때 손바닥에 그려줬던 그림과 똑같았다. 물어보고 싶은데, 뭘 바라보고 있는 등인지. 토닥이고 싶게 외로운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어둡고 심심하면 폰이라도 쳐다보면 되는데 태형은 굳은 의지로 폰 한번 켜지 않고 203호 앞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야 선생님이 날 데리고 들어가줄테니까. 야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좀 변태 같지만, 발소리만 들어도 그게 쌤인 거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멈칫 한 번 없이 들어와 도어락 버튼을 누른다. 태형은 신경도 쓰지 않고. 눈 앞에서 현관문이 닫혀서 조금 당황했다. 문 너머에서 잠시 인기척이 들린다. 문이 다시 열렸다. 손에 들려있던 검은색 봉투가 사라졌다.
“들어와.”
“넹.”
또 문이 닫히면 다시는 안 열어줄 것 같아서 조금 서둘러 들어갔다. 선생님은 냉장고에 곧장 넣어두었던 맥주캔을 꺼낸다. 오늘은 캔이 좀 크다. 마음이 허한 날인가. 용건을 말하지 않는데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아서 태형은 내심 섭섭하다. 오늘 내가 상담실로 끌려가는 거 쌤도 봤으면서. 궁금할 거면서.
“배고파요.”
“…….”
“쌤은요?”
“뭐 시켜줄까.”
“치킨 어때요.”
석진은 큰 고민 없이 일어나 서랍 하나를 뒤져서 주문책자를 태형에게 건넨다. 먹고 싶은 거 시켜놔. 나는 좀 씻고 나올게. 넹. 태형은 단정하고 발랄하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이 뒤집어졌다. 열 아홉 짝사랑러를 집에 데려다 놓고 씻는다고 하다니. 너무 하시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기 벽 너머에서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는 물소리가 들린다. 양념간장 세트를 시켜놓고 어색하니까 티비도 좀 틀어놓고 얌전히 기다리는데 문자가 우수수 쏟아진다.
[본가로 오랬지]
[김태형 너 말 진짜 안들을래]
[엄마 생각도 좀 해]
디링디링. 태형은 문자에 박힌 글자들을 모양을 보듯이 본다. 털 끝의 다정도 묻어나지 않는다. 욕실문이 열린다. 석진은 잔뜩 수수해진 채로 나온다. 집이 크지 않아서 욕실에서 나온 훈훈한 증기가 태형에게까지 와서 닿는다. 몸이 움츠러 들었다. 석진은 젖은 목덜미에 수건을 두르고는 반 쯤 남은 것 같은 맥주캔을 집어든다. 샤워가 길지 않았는데도 맥주캔에는 물방울이 송글하게 맺혀있었다. 나도 먹고싶다.
“아마 치킨 오면 먹기 바쁠거니까요.”
“…….”
“그 사이에 저의 TMI를 뿌릴까해요.”
말투는 영락없는 열 아홉인 척 하지만 뱉어낼 이야기들은 한 개도 안 가벼웠다. 말하는 건 쉬웠지만 겪는 나는 사실 조금 어렵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서 담임 옆에 있는 김석진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요새 깨지고 다녔잖아요.”
담임이 걱정이 됐는지 엄마한테 얘기를 했어요. 어제 찾아와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한 두 어 시간 괴롭히다가 갔거든요. 본가로 들어가면 저는 인제 아마 죽은 사람이 될 거에요. 엄마 재혼한다고 했거든요. 국회의원이랑. 집에 들어오라고 하는 이유도 하나일 거에요. 결혼한다는 사람이나 아빠한테 털 끝 만큼 책 잡히기 싫어서. 엄마는 그런 거 못견디거든요.
“있잖아요, 저 일 년 사이에 20센치 컸는데.”
“…….”
“저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본가로 들어오라는 말이었어요.”
보통 엄마들은 안 그러지 않아요? 너무 구시대적 발상인가, 내가.
태형은 중얼거리다가 석진을 빤히 본다. 길지 않은 얘기 사이에 석진의 캔이 다 비어버렸다는 것도 알고있다. 선생님의 속을 허하게 만든 건 나일까. 전에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왠지 마음이 좀 싸하게 아프다. 가만히 티비를 보는 선생님이, 김석진이. 나에게 조금 어려워진다. 타이밍도 좋게 벨이 울렸다. 선생님은 카드를 내밀고 멀끔하게 포장된 치킨을 태형 앞에 내려 놓는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 먹지 않으면 집에 가야하니까 대충 펼치는 걸 도왔다. 선생님은 일어나서 맥주를 들고 돌아온다. 두 캔이었다. 석진은 까서 하나를 내밀어 앞에 놔주었다.
“저 이거 먹어요?”
“응.”
“왜요. 저 술 마시면 안되는데.”
“주사있니?”
“모르는데요, 안 마셔봐서.”
“그럼 마셔봐.”
주정 있는지 봐줄게.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태형은 그냥 그 말을 듣기로 했다. 거짓말이 아니고 맥주는 생전 처음이었다. 일년 전엔 160도 되지 않아서 그저 조용히 학교를 다녔고 지금 친구인 애들도 술을 먹고 다니는 부류는 아니었다. 피씨방이나 가고 코노나 가서 놀지. 태형은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는 크으, 하고 티비에서의 모습을 흉내내본다. 석진은 그걸 보고 웃는 척을 했다. 선생님이 아까부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어른처럼 맥주를 마신다. 어떻게 크으, 도 안하고 그걸 삼킬 수 있는 걸까.
“태형아.”
“……예?”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해.”
석진은 캔을 내려놓고 손 끝으로 잘 생긴 눈썹과 이마 사이를 매만진다. 선생님의 말이 겹겹이 쌓여있어서 태형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 유독 참 어려워서 좀 밉다.
“어른이 되니까 작은 거짓말도 들킬 것 같아서 못해.”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나한테 너무 솔직해지지 말아.”
왜요?
“나는 거짓말을 못하니까.”
거짓말이 아닌 마음은 뭔데요.
“네가 조금 신경쓰여, 내가.”
꼭, 좋아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좋아해요.”
참지 않고 말한다. 선생님은 흔들리지 않는다.
음. 혹은 흔들리지 않는 척.
“그럴 수 있어.”
“뭐가요.”
“아직 어려서 그래. 대학 간다고 했지. 거기 가면 예쁘고 잘 생긴 애들 차고 넘쳐.”
“저 좀 봐봐요.”
저한테는 선생님이 제일 예쁜데요.
태형은 그렇게 말을 한다. 석진은 캔맥주를 들이킨다. 매번 쉽게 나오던 이 애의 말에 쉬운 척이 느껴진다. 마음이 약해지는 속도에 속도가 더해진다. 석진은 마지막 모금을 들이키고 맥주캔을 꽉 쥔다. 손 안에서 맥주캔이 구겨진다. 예민하고 날이 선 열 아홉의 눈길이 거기에 갔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온다. 나는 다 큰 어른인 주제에 이 애한테 약해진 마음을 들켰다.
“좋아해요.”
또, 맥락없고.
“안되겠죠?”
이젠 쉬운 척도 안했다. 나는 가르치는 게 직업인 사람인데, 이 애한테 쉽게 날 잊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가 없다.
“포기 안하게 해주세요.”
“태형아.”
“그렇게 부르지 말고요.”
대충 달래려고 하지 말구요. 태형의 눈은 새카맣게 빛이 난다. 석진은 대충 쥐고 있던 맥주캔을 들여다보다가 조금 대놓고 그 애를 본다.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거 빤히 알면서 이 애가 쉽게 꺼내는 말들에 속수무책이다.
석진의 입술 새로 작게 새어나오는 한숨과 적막을 이길 수 없었던 태형은 허리를 조금 숙여서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대본다. 태형은 굳어있는 석진의 볼 언저리에 작게 입을 맞춰본다.
뭔 짓을 한 거야. 석진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애가 따끈하고 커다란 손으로 볼 언저리를 잡아 쥐는 게 느껴졌다. 입술에 입술이 와서 닿는다. 혀도 섞이지 않는 짧은 키스였다. 잠시 감겼던 눈은 석진이 먼저 떴다.
그 애는 한참을 눈을 감고 영원히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필사적으로 감고 있던 눈을 뜬다. 적막. 태형이는 아랫속눈썹이 참 길다.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눈이 엄청나게 치열했다. 혼내야하는데 그럴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생각마저 빤히 다 읽는 눈. 내가 아무래도.
“…저, 가야겠죠.”
“그러는 게 좋겠다.”
“안녕히 주무세요.”
“…….”
“쌤, 아무래도 저는 잘 못 잘 것 같아요.”
“빨랑 가.”
“네.”
그 애는 흥분과 민망함, 좋고 신남이 뒤섞여 우당탕탕 운동화를 꺾어 신는다. 태형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급박하게, 윗층으로 올라가는 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석진은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커다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열 아홉에게 완벽하게 말려버린 순간을 되짚어봤자 소용이 없다. 급하게 빈 속에 들이킨 맥주 때문에 얼굴이 뜨끈하다. 손은 차갑고 볼은 화끈거렸다. 석진은 뒤로 몸을 기댄다. 소파에 건조하게 널려서 한숨 비슷한 걸 내쉬었다.
다치고 싶지 않은 마음,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 겨우 열 아홉인 애가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것 같은 마음. 겨우 열 아홉인 애한테 해부되고 싶지 않은 마음. 온갖 마음이 뒤섞여 무거운 숨으로 쏟아진다.
태형아. 아무래도 내가 널 조금 좋아하는 것 같지?
문을 열고 그대로 침대에 엎어져서 발을 굴렀다. 선생님은 무표정해서는, 단 하나도 받아주지 않았지만. 혼나거나 뺨 맞지 않은게 어디인가. 태어나서 한 미친 짓 중 단연 일등이었다.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고 마음이 파도를 친다. 태형은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그 안에서 헤엄치고 있다.
나는 선생님보다 덜 살았고 덜 알고 덜 자라서 그저 열심히 사랑을 하는 수 밖에 없다. 정확하고 끝없는 사랑을 하다보면 언젠간 나도 조금 더 살고 조금 더 알게 되고 더 자라서 맞닿을 수 있겠지. 벌떡 일어나서 스탠드를 켜고 문제집을 뒤진다. 김석진이 그 나긋한 목소리로 읽어주던 시들을 꺼내보았다. 그 문장에 기대어 선생님을 떠올렸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 미래를 생각했다. 선생님의 이름을 혀로 굴려보는 미래말야.
여전히, 예뻐요.
사랑합니다.
그런 가장 솔직하고 베일 없는 말을 어떠한 은유도, 숨겨진 목적 없이 전하는 날을.
인생은 미래의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릴 안온한 품을 향해 무릎이 깨져도 달려가는 거랬다.
또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라고 했다.
누가 그랬냐면 문학을 가르치던 선생이 말했다. 푸르던 연한 눈빛으로. 작품 뒤에 교묘하게 숨어서, 아닌 척 자기 얘기를 하던 사람. 내 등 앞에서 내 입맞춤을 받아낼 사람.
나는 무릎이 깨져도 달릴 사람이고, 그는 안온한 품을 가진 사람이다.
석진은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태형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손 끝에 포스트잇 두 어장을 들고. 등에서 떼낸 모양이었다. 뭐야? 하고 물으려는데 그 애가 부욱 포스트잇을 찢어버린다. 이런 거 반 애들이 붙이게 놔두지 마세요. 그 말에 연약한 가시가 돋아있었다. 뭔데, 하고 가져가려는데 포스트잇은 태형의 손에서 꾸깃 구겨졌다.
“선생님이 지들꺼래요.”
“아.”
“아닌데.”
“...”
“내껀데.”
“얼씨구?”
그게 뭐에요. 아저씨 같은 추임새. 태형은 뭐라하면서도 입꼬리를 감춰 누르지 못한다. 옆구리에 끼워놨던 문제집을 들고는 저 이거 알려주세여, 하고는 물어왔다. 좋아하는 걸 교묘히 숨기고 선생님이라는 석진의 지위를 아주 잘 이용해먹고 있었다. 석진은 배움에 뜻이 있는 학생을 밀어낼 구실이 없어 태형을 데리고 순순히 교실로 갔다. 보충까지 끝나고 텅 비어버린 교실에 둘만 남아서 도란도란 말이 이어진다. 태형은 문제집이 아니라 석진의 얼굴을 본다. 석진은 자꾸만 문제집을 톡톡 두드려서 주의를 환기시켜야 했다.
“내가 지금 뭐 설명했어.”
“…….”
“나 간다.”
“사..씨남정기가.. 복선화음.. 어쩌구.”
어쩌구?
태형은 히, 하고는 웃는다. 석진은 미련없이 일어나 깔끔히 자리를 정리한다. 태형이 팔목을 탁 붙잡았다. 석진은 채인 몸을 가만히 두다가 슬쩍 팔목을 빼낸다. 태형의 눈은 맹목적이고 사랑이 가득하다. 이 애가 이상한 소문을 낼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했다.
“태형아.”
“잘못했어요.”
“……?”
“선생님 몸에 손 안댈게여.”
“…….”
“좋아하지 말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저도 어쩔 수가 없는 거니까.
“저 못받아주는 거 알아요.”
“…….”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이거 저도 안다구요.”
그 고전명작을 알아? 석진은 혼자 분한채로 쭝얼거리는 태형을 빤히 본다. 말을 할 수록 게이지가 차오르듯 그 애의 귀가 빨갛게 변한다.
“그냥, 제가 오래 좋아할래요.”
“…….”
“내비두세요.”
마음도 쓰지 마시고요. 절대 쓰지 마세요. 쓰기만 해보세여 아주.
태형은 혼자 분한 채로 문제집을 쾅쾅 챙기고는 석진을 두고는 가버렸다. 저 나이 때는 마음이 널을 뛰는 법이다. 석진은 뒤늦게 나가서 교실 문 밖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본다. 그 애는 걸음이 빨라서 벌써 사라졌다. 복도는 텅 비어 아무도 없다. 다시금 봐도 없다. 저무는 오후 빛이 학교를 가득 채웠다. 씩씩대며 떠났을 태형이의 뒷모습을 혼자 생각하다가 픽 웃었다. 문제집 끝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혼자 웃긴, 바보 같이.
강한 파열음에 우산을 쓰고 걸어가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대학가이긴 해도 술집 없이 빌라만 가득한 곳이라 소음은 줄곧 없었던 동네였다. 소리의 진원지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해오름빌이어서 석진의 발걸음이 조금 급해진다. 비가 와서 축축해진 골목으로 집에서 나온 것 같은 가구들과 생필품들이 엉망으로 버려져 있었다. 남자들 몇 명이 계속해서 뭔가를 들고 나와 멋대로 버리고 있다.
빌라 앞에 주차된 낯선 외제차들을 보자마자 석진은 우산을 접고 서둘러 계단을 오른다. 2층을 넘어 3층으로. 303호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그 사이에서 스탠드와 옷을 한웅큼 들고 나온 남자가 험악한 표정으로 석진의 정체를 물었다. 우산을 그대로 바닥에 버려두고 복도를 지나간다. 앞을 막는 남자를 쳐내고 조금, 이상하게 맹목적이었다.
열린 문 틈 안으로 엉망이 된 집 안에는 태형이 서있다. 우두커니 서있는 얼굴이 붉다.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건지. 머릿속에선 재생되서는 안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들만 스쳐지나가고 있다. 어지러운 빗소리 너머로 여자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야. 현관을 등지고 있던 여자는 낯선 인기척에 뒤를 돈다.
“뭡니까?”
“…김태형.”
여자를 사이에 두고 태형이 석진을 보는 게 느껴졌다. 굳게 닫혀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일렁거린다.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표정이다. 소리치는 여자에게 대고, 저 태형이 학교 선생님입니다. 하고 정신이 하나 없는 낯선 자기 소개가 이어진다. 한풀 누그러진 것 같은 여자의 눈빛엔 아직도 경계가 어려있다. 닮았다. 커다란 이목구비가 태형이랑 꼭 빼닮아있다. 그게 조금 아팠다.
“여기는 무슨 일로…….”
“애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쟤가요?”
좀 전까지 바락 바락 소리지르면서 대들던 앤데요. 여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는다. 됐고, 집안일이니까 신경쓰지 마세요. 여자는 긴 손톱을 신경쓰지 않고 가만히 서있는 태형의 팔목을 잡아 쥔다. 고집 좀 부리지마. 태형은 그 팔을 뿌리친다. 팔에 긴 생채기가 난다. 피가 나는 건 태형이 쪽인데 여자는 소리를 빽 지른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태형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요.”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 태형이 석진에게 그렇게 말을 한다.
“집에 가요.”
“태형아.”
“그냥, 좀 가요.”
울컥이는 목소리가 뒤에서 울린다. 뒤를 돌아볼까 그 사이에 수십 번 고민하다가 안타까운 시선을 남겨두고 석진은 조용히 걸음을 옮긴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봤을 때, 여자는 둑이 터지듯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태형이 깨진 유리 사이를 헤치며 걸어가 여자의 마른 등을 어루만지는 걸 보았다. 그 애도 울고 있었다.
새벽녘에 층을 올라본다. 303호는 멀끔하게 비워져 있었다. 밤새 부숴졌던 유리는 흔적도 없이. 그리고 김태형이란 애는 살았던 흔적조차도 없이. 이어팟을 꽂고 학교에 간다. 교무실에 들렸다가 반에가서 조례를 하고, 3교시를 기다렸다. 4반 수업에 갔을 때 그 애의 자리가 텅 비어져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와서도 멍한 정신이 돌아오지 않는다. 때 마침 돌아온 태형의 담임에게 말을 붙였다.
“선생님.”
“네?”
“태형이 말이에요.”
“아, 태형이요?”
오늘 새벽같이 와서, 퇴학 수속 밟았어요. 그것 때문에 오전 내내 정신이 하나두 없었네. 자리에는 정말 이것 저것 서류들이 한 가득이다. 왜요? 하고 묻는 말에 4반 담임이 웃으며 석진을 쳐다본다. 자기 반 애가 떠났는데 담임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비밀을 말하고 싶어 안달난 표정이다. 석진은 채근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여자는 누가 들을새라 목소리를 한껏 낮춘다.
“저도 몰랐는데, 그 애요.”
“…….”
“사생아래요.”
판사라고 했던 아버지 아들이 아니라고. 그 집 막내딸 스캔들 터질까봐 그 회사에서 함구령 내리고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그 애 누구 자식인지 밝혀지면 정경계가 발칵 뒤집힌다고 찌라시까지 돈대요. 이 얘기 증권회사 다니는 친구가 알려줬는데, 걔가 서태지 이지아도 다 알고 있던 애라니까요.
“재미있으세요?”
“네?”
“…….”
“아, 그건 아니고.”
그냥 얘기가 그렇다는 거죠. 태형이 같은 배경의 애가 흔치가 않으니까. 황급히 말을 마무리한 선생은 서류를 챙겨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라진다. 답지 않게 날을 세웠던 석진은 가만히 앉아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책장에 꽂힌 분홍색의 책에 시선이 가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조금 요란한 학생이 하나 스쳐지나간 거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하는데. 마음은 도무지 정돈이 되지 않는다.
퇴근길, 현관 앞에 오도카니 그 애가 있다. 교복 대신 사복. 석진은 걸음을 빨리한다. 지난번엔 한번 무시했지만 이번엔 무시하지 않는다. 태형아, 하고 부르니 고개를 드는 얼굴에 어른의 고단함 같은 게 조금 묻어있었다.
“오늘은 야자감독 안하셨어요?”
“…어.”
“다행이다. 저 좀 있으면 가봐야하거든요.”
바로 비행기 태워서 보내버린다고 하더니, 진짜루요. 아니 나 여권 없었으면 어쩌려고요. 그쵸.
태형은 혼자 머쓱하게 중얼거린다. 운동화 끝은 불안하게 바닥을 톡톡 건드리고 있다. 허망하게 쏟아지는 한숨이 어색한지 입술 끝을 꼭 다물고 태형은 석진을 본다. 선생님은 연하고 푸른 눈빛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쳐다봐줘서 또 여전히 계속 맹목적으로 내가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데.
“그 사람 우리 엄마에요.”
원래는 착한 사람인데.. 실수했대요. 그 실수로 태어난 게 저인데, 제가 여기 있으면 문제가 많이 있나봐요. 너무 불쌍해서 말 들어주기로 했어요. 선생님 때문에 안가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어요. 잘 안돼요.
그 애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다.
“…쉽지가 않아요.”
사는 거 되게 쉬웠는데, 선생님 만난 이후론 다 쉽지가 않아요.
태형은 울음을 참으려고 기를 쓰고 있다. 쪽팔려서 그랬다. 어디서 실수로 낳아진 것도, 그래서 멀리 가야하는 것도. 어제는 정말 죽고싶었다. 선생님이 눈 앞에 있는 게 처음으로 너무 싫고 미웠어. 너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좋아함을 이기지 못해 우는 건 너무 쪽팔린 일이다. 석진은 가만히 서서 그걸 다 들어주다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태형의 손에 쥐어준다. 소주와 맥주가 가득이었다. 혼자 먹고 취할 정도로 많았다. 빈 손으로 석진은 그제야 태형의 얼굴을 한번 제대로 만져보았다. 맥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곧 곧게 고정이 된다.
“기다릴게.”
“…….”
“포기 안했으면 좋겠어.”
석진의 입술이 태형의 입술 위로 작게 겹쳐진다. 말랑이는 입술 아래로 떨리는 열 아홉의 입술을 과하지 않게 삼켜내고 위로하고 난 뒤 천천히 떨어졌다. 태형은 눈을 감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랑한 약속이자 선언. 그 애는 그 말을 할 때는 울지 않았다.
저를, 기다려주세요.
그 목소리가 가슴을 깊게 찔렀다.
태형은 버스카드를 하나 사서 광화문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풍경이 꽤나 아름답다. 가을이라는 날씨가 거기에 한 몫을 더했다. 하늘이 높아서 공간을 빌려쓰는 느낌까지 들었다. 월요일의 점심시간을 맞아 직장인들이 커피를 들고 수다를 떨며 걷고 있었다. 서울에는 거리마다 꼭 TV에 나오는 것 같은 사람들이 늘어져 있었다. 누구보다도 제일 많이 생각이 났다.
다른 모든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석진도 학교를 로테이션을 돌았다. 흔치 않은 경우로, 2년을 다른 학교에 근무하던 석진은 다시금 돌아 태형이 다니던 학교로 돌아왔다. 스물 넷의 태형이 학교로 발을 들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학교가 소란스러웠다. 체육복을 입고 정신 없이 몰려다니는 무리들을 보니 체육대회 날인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학생 하나를 붙잡고 다짜고짜 석진의 행방을 물었다. 누구요? 아, 김석진 선생님이요. 너 봤냐? 석진쌤? 수소문을 해서 다다른 곳은 양호실이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나와있는 덕분에 학교 안은 침잠한 듯이 조용하다. 똑똑 노크를 했다. 네, 하고 작게 울리는 소리에 태형은 문을 연다.
겹겹이 커튼이 치여진 베드는 모두 텅 비어있다. 제일 안 쪽, 베드에 석진이 앉아있었다. 무릎을 제대로 깠는지 붕대 너머로 피가 슬며시 올라와 있었다. 석진은 태형을 보고 베드에서 내려와 선다. 지금보니 무릎이 까져도 달려올 사람이 선생님이었다면 그를 안아줄 안온한 품은 나였을지도 몰라. 나는 그만큼 자랐을까. 언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말을 잊은 것처럼 가만히 서있었다.
흑갈색의 머리, 하나도 변하지 않은 무채색의 차림. 푸르던 연한 눈빛으로. 너무 오래 기다려서 잠시도 지체할 시간 없이 태형은 팔을 벌리고 그대로 다가간다. 터질듯이 품에 그를 꼭 안았다. 내 마음은 결코 작지 않아. 그의 귀에 대고, 물렸을 만큼 많이 들었을 선생님 소리는 과감히 생략했다.
여전히 예뻐요.
사랑합니다.
낯뜨거운 고백, 부끄러움에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순결 아닌 순결을 지킨다고, 키스는 전혀 늘지 않았겠지만 나이가 빚어내는 분위기가 있을 거라 태형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길게 입을 맞추고 기다렸던 마음을 읊는다.
나의 수수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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